요즘 한보사건이나 대선자금 의혹, 그리고 불우이웃돕기 등을 보면서 나는 몇해전 「문화설계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처음 비친 「삥땅문화」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현재 우리의 문화에는 삥땅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은 한국문화가 지나치게 남을 위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의라는 명목으로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낸 이름이다.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무슨무슨 명목으로 남의 봉급이나 연구비에서 돈을 떼어 낸다. 『해왔던 것이니까』또는 『좀 도와주어야 하겠으니까』라는 이유로 돈을 가져간다. 정부는 다른 국가적·사회적 명목을 들어 기업이나 가정에서 강제성 성금이나 기금을 거두어 들인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니까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생각이 팽배해 있다. 돈만 「삥땅」 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나 노력이나 이름도 삥땅당한다.
각종 의연금이 그렇게 흔한 것도 우리나라의 특징이라 하겠다. 정부가 또는 구호기관이 맡아서 할 일도 참지 못하고 의연금 모금에 앞장서는 사람이 여기저기 튀어나온다. 그래서 사람을 압박한다. 모두 선의를 내세워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좋은 일 하는데 웬 군말이냐』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따르지 않으면 배반자로 몰 기세이다. 이렇게 해서 나서는 사람은 사회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한몫 보고, 돈 많은 사람은 이럴 때 큰돈을 내서 빛을 낸다.
구한말의 기록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그때에도 잘 도우러 나섰다. 남을 잘 돕는 사람들만 많은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돕는 일을 부추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일이 커지면 국가 차원에서 삥땅이 일어나 사회적 물의를 빚는다. 연전에 북한의 금강산댐에 대비한 댐을 만든다고 정부가 국민의 국방의식에 호소해서 국민으로부터 거액을 뽑아 내 유용한 일도 기억난다.
이렇게 우리는 좋은 명목에 약하다. 이것이 역으로 작용해서 뇌물성 선심에도 이런 좋은 이유를 대고, 받는 쪽도 그런 좋은 의도만을 생각하고 쉽게 받아버린다. 그러나 그것이 뇌물이란 엄연한 사실은 그대로 남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사회는 진정한 선의와 가짜 선의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잊은지가 오래다.
문제는 큰 돈을 내는 사람이 제돈 내는 경우보다는 남의 돈을 삥땅한 것을 낸다는데 있다. 삥땅한 것이 아니면 남의 돈을 모아서 내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돈을 낸 사람이 모두 인정을 받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어느 회사 직원 일동이라고 하고 금일봉, 그리고 이 돈을 모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된데는 매스컴에도 문제가 있다. 돈을 모아서 냈으면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모두 보도해야 마땅할 것이다. 액수에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힘들여 모은 돈에서 큰 액수를 내는 사람은 특별한 인정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제 돈이 아닌 돈을 모아서 낸 사람의 이름이나 사진을 크게 내주어 이런 풍조를 조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름이 삥땅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름의 삥땅이 가능하다는 기대심리에서 돈을 모으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본다. 무릇 선행은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이 정도인데도 말이다.
나는 이런 버릇이 유난히 권력욕구가 강한 한국인의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름도 날 뿐더러 일을 벌이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로 인해 사람들이 고달퍼지는 것이다.
요즘 「생활의 질」문제를 말하는데 교양과 취미를 키우고 살릴 기회가 많고 생활환경이 쾌적하면 생활의 질이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사회에서 남을 피곤하게 만들고 고달프게 만드는 행동이 없어져야 진정으로 생활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다. 좋은 명목을 대고 도와야 하니까, 돈을 내라고 압박하는 문화에서 어떻게 진정으로 남을 돕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또 진정으로 도우려는 순수한 마음이 설 땅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삥땅이 횡행하면 우리는 질질 끌려다니는 생을 살게 된다. 그 이상 어떻게 더 뚜렷하게 생의 질 저하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의 권리를 선의의 이름으로 침범하는 일이 없어져야 비로소 비온 뒤의 아침처럼 사회의 공기가 맑아질 것이고 그래야 국민도 진정으로 창의적이 될 것이다.<심리학>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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