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승 세종을 다시 배웁시다”/유별난 인애정신으로 문화황금기 이끈 성군 그 참뜻 되살릴때/올해엔 기념관 확충 문화사대계 편찬계획 기업 관심 가졌으면…15일로 세종대왕 탄신 600돌을 맞는다. 세종은 15세기 전반을 문화의 황금기로 가꾼 영명한 군주였다. 북방영토개척부터 한글창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민족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시켰다. 그 업적은 역사속에서 뛰쳐나와 과학과 문화의 시대가 될 21세기를 앞둔 우리에게 엄청난 현재적 무게로 다가온다. 탄신일을 앞두고 박종국 세종대왕기념사업회장을 만나 세종과 그 시대의 의미를 들어보았다.<편집자 주>편집자>
□대담:이광일 문화부 기자
―왜 이 시대에 새삼 세종대왕을 다시 이야기해야 합니까.
『그 분의 업적도 업적이지만 그 분의 정신 때문입니다. 그 무수한 업적을 가능케한 정신과 인품을 알면 세종이 왜 오늘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성현의 풍모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절대군주시대의 통치자로서 국민을 억누르는 대신 사랑하고 베풀고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차원 높은 문화와 과학의 황금기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봉건군주시대였는데 국민을 사랑했다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의 개념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세종대왕이 활동했던 15세기 전반기는 봉건군주가 통치하는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러나 봉건시대라고 해서 국민을 무조건 억압하기만 한 사회로 생각하면 아주 잘못입니다.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항상 국민을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합니다. 그 분의 인애정신은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지요. 세종대왕은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되면서부터는 국가경영을 위해 좋아하던 잡기를 다 끊었어요. 살아있는 동안 국민을 위한 일만 한다는 생각으로 국정에 헌신했습니다』
―인간 존중의 사례를 좀 들어주시지요.
『교도소(옥)를 봅시다. 당시 죄수들이 옥에서 죽는 일이 흔했습니다. 죄인이라고 해서 막 대하는 것은 물론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지요. 세종은 「옥은 원래 죄를 다스리기 위해 만든 것이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죄인 중에 병들어 죽는 이가 많은 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이 추위, 더위, 질병, 굶주림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옥을 깨끗하게 청소하도록 했고 병든 자는 치료하게 했습니다. 이를 따르지 않는 관리는 엄벌에 처했지요. 지나친 형벌을 금하고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사형에 해당하는 죄수의 경우는 3심제를 적용토록 했습니다. 또 당시에는 죄수의 등을 때렸는데 너무 끔찍한 일이라 하여 엉덩이를 치는 곤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15세 미만과 70세 이상은 살인죄나 강도죄가 아니면 가두지 못하게 했고 10세 이하와 80세 이상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더라도 가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당시 최하층인 관청에 속한 노비에게도 산달과 산후에 100일의 출산휴가를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비춰봐도 파격적인 일입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요즈음인데 그런 점에서는 어떻습니까.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본인까지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신숙주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 만주어까지 능통할 정도였지요. 중국의 문물을 익히는 것이 나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대였으므로 글로만 배울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해 직접 필요한 것을 입수하자는 것이었지요. 의학이나 농업, 과학분야의 이론을 집대성하거나 천문기기를 만들 때도 수시로 담당자를 중국에 유학보내 자료를 수집하게 했습니다. 이런 자세는 요새 말하는 세계화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주정신은 굳건했습니다. 세계화라는 것도 우리가 잘 되기 위한 것이지 무조건 남의 것을 추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중에서 무엇을 가장 높이 평가하십니까.
『업적이 하도 많아서…. 어쨌든 훈민정음 창제 하나만으로도 천추에 빛나는 업적입니다. 제가 국어학자라고 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한글은 숭례문도 아니고 도자기도 아닙니다. 불타거나 깨질 염려도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머리가 남아 있는 한 절대 없어지지 않는 국보중의 국보입니다. 특히 훈민정음은 단순히 글자만이 아니라 일종의 파격적인 「문화선포문」입니다. 훈민정음 서문은 「우리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합니다. 이는 당시 국제관계나 국내 문화적 풍토로 미뤄 볼 때 상상을 불허할 만큼 놀라운 발상의 전환입니다. 국제관계로 보면 중국에 대해 사대를 해야 하는 처지에서 우리의 독자적 문자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소지가 컸습니다. 국내적으로 보면 한문을 자기글처럼 쓰던 지식인 사회의 반발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는 것은 일종의 독립선언문과 같은 것입니다. 그 수백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 진취성과 자주정신, 그리고 과학적 접근법에는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입니다. 또 대학자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의 학문적 업적도 한글이 없었으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한글 설명이 없다면 그 많은 한자의 발음과 정확한 뜻을 제대로 배우는 데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이 한문공부에도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사서삼경도 처음에는 한글로 풀이한 언해서로 공부했지요. 그런 기초가 없었다면 조선시대에 학문이 발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어떤 단체입니까.
『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한국문화 발전을 위해 설립한 사단법인입니다. 학계 교육계 문화계 언론계 등 28개 사회문화단체 대표들이 56년 10월9일 당시 경기여고 강당에서 한글날 기념식을 하면서 발의해 설립했습니다. 그동안 조선왕조실록 등 세종 관련 책자를 편찬·번역·간행하는 사업 등을 해왔습니다』
―올해에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우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의 157 홍릉 뒤편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을 대지 550평에서 3,750평 규모로 확장할 예정입니다. 워싱턴의 링컨기념관같은 것에 비하면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어요. 또 내년 말 목표로 기념관 앞뜰에 세종대왕기념탑을 건립하려 합니다. 이와 함께 세종문화사 대계를 편찬할 것입니다. 문제는 사업비지요. 올해 정부보조가 고전국역사업 등에 5억원밖에 안됩니다. 기업쪽에서 좀 관심을 기울여주면 좋으련만…』
―기념관에는 학생들이 많이 옵니까.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찾아옵니다. 어렸을 때 측우기나 해시계, 악기, 훈민정음의 실물을 대한다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선생님들이 좀 더 신경을 써서 견학시켜주면 좋겠습니다.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이 민족의 큰 스승인 세종대왕 탄신일에서 따와 제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만큼 우리는 세종을 모르고 있지요』
□약력
△1935년 경기 화성 출생.
△59년 연세대 국문과 졸, 건국대 대학원 수료.
△61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사무국장.
△72년 세종대왕기념관 관장.
△84년 한국겨레문화연구원 원장, 한글학회 감사, 한글서체개발 운영위원장.
△90년 5월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연세대·한양대 강사.
△저서:「훈민정음 주해」 「말본사전」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국어학사」 「용비어천가 역주」 「한국어발달사」
△공저:「세종대왕 전기」 「세종대왕 어록」 「월인석보 역주」 「한국고전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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