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00주년이다. 조선 4대왕 세종은 조선 500년의 틀을 완성한 우리나라 최고의 탁월한 군주였다. 세종대왕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우리나라의 현 국토를 획정했고 정치 경제 문화 국방 과학 외교 사회 등 온갖 분야에서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세종의 시대는 과학과 문화가 5,000년 역사상 가장 꽃핀 시대였다. 21세기를 맞아 국가경쟁력을 제고해야 할 우리에게 성군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왜 다시 세종을 말해야 하는가」를 매주 월요일 시리즈로 탐구한다.<편집자 주> ◎인간 세종/문예부흥·국토확장… 문과 무 조화시킨 ‘해동요순’/먼저 보낸 아내·자식 그리움속엔 보통사람 면모가… 편집자>
『무고히 쳐들어와 양민을 죽이고 잡아갔으니 그 극악한 죄는 베어 없애버려야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지난날 대마도를 정벌할 때도 혹은 치자 하고 혹은 말리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대의로써 결단하고 토벌한 결과, 왜구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머리를 수그렸다. 나는 이번 일도 대의로써 결단한 것이다』
1433년 1월15일, 세종은 여진족정벌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장수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렇게 북벌의 대의를 분명히 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조종봉강)는 한치도 줄일 수 없다」는 신념을 임금의 강렬한 눈빛에서 읽었다. 지와 용과 덕을 두루 갖춘 최윤덕은 자신을 북벌의 대임자로 선택한 세종의 의중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훗날 사관은 이렇게 썼다.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과감하게 결단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정사에 힘쓰기를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 문과 무의 정치가 빠짐없이 잘 되었고,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해동요순이라 했다(세종실록 127권 32년 2월17일조)」.
오늘 우리에게 세종대왕은 어떤 모습으로 부조돼 있는가. 600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1397년, 태조 6년 4월10일(양력 5월15일) 초여름날. 서울 준수방(지금의 종로구 통인동) 정안군 이방원(후일 태종)의 저택. 민씨 부인(후일 원경·원경왕후)이 세째아들 도를 순산했다. 기이한 꿈을 꾼지 열달만이었다. 꿈은 상서로움을 극하고 있었다. 어느날 민씨가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데 큰 황소가 구름을 타고 북악산 위에 나타났다. 한데 소가 봉우리를 헛디디는 바람에 뿔 사이에 끼어 있던 불덩이 같던 태양이 산 밑으로 굴러떨어지면서 민씨를 덮쳐 왔다. 민씨가 놀라 자지러지는 순간 어디선가 붉은 옷을 입은 꼬마가 나타나더니 태양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민씨 품으로 뛰어들었다.
권력쟁취의 피로 얼룩진 어수선한 세월을 훌쩍 지나 1418년 8월10일. 도는 스물둘 패기만만한 나이에 즉위, 국가경영의 대권을 잡았다. 위의 두 형님대신 그가 하늘의 부름을 받은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의 재위 32년은 5,000년 한국역사의 황금기로 찬란한 업적의 점철이었다. 하지만 즉위 후 5년간은 태종이 상왕(자리를 물려준 왕)으로서 군사·외교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태종은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갈테니 너는 태평의 시대를 열어라』며 외척처단 등 악역을 도맡았다.
세종은 영명한 경세가였다. 의지도 강인했다. 도량은 바다같이 넓었다. 조세제도의 틀을 다시 짤 때 당시로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유례없는 대규모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 세종실록 49권 12년 8월10일조. 「호조(경제부처)에서 서울과 각 지방의 새 공법(토지세제도)에 대한 찬반 여부를 아뢰기를, …좋다는 자는 9만8,657명이며 안된다는 자는 7만4,149명입니다 라고 했다」. 아무리 너그러운 군주라도 지역별, 신분별로 이토록 성심껏 여론에 귀 기울인 통치자는 없었을 것이다.
세종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낮에는 노동하고 저녁엔 낚시하고 밤에는 독서하는」 전인이었다. 그 바탕은 성인을 지향하는 유교적 이상주의였다. 하루는 상림원(임금의 정원) 직원이 화초그릇을 들여놓자고 청했다. 세종은 『나는 천성이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릇 뽕나무 닥나무 과실나무를 가꾸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하나같이 일상생활에 긴요한 것들이다(세종대왕신도비 및 실록 30권 7년 12월5일조)』고 말했다.
세종은 개인으로서도 훌륭한 남편이요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맏딸에 이어 5남 광평, 7남 평원대군을 보름 상관으로 앞세웠다. 아내 심씨(소헌왕후)까지 먼저 보내야 했다. 아내의 일은 유달리 한스러웠다. 친정아버지(당시 영의정 심온)가 상왕 태종의 비위를 거슬려 사약을 받고 피를 토했다. 친정어머니는 관가의 노비가 되고 집안은 풍비박산했다. 세종은 태종에게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했다. 나라의 주인으로서 처가조차 보호할 수 없었다. 월인천강지곡(달이 1,000개의 강물에 두루 빛을 비추는 것에 비유해 부처의 자비를 읊은 노래)의 한 귀절은 이런저런 심정을 말해준다. 『설운 일 가운데 헤어짐이 가장 심하니 부모 자식 이별이 어떠한고? (석가모니께서) 도를 깨친 뒤에는 자비를 베푸신다더니, 이런 일이 자비인지 묻고 싶습니다』
15세기 전반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부흥시키면서(르네상스) 인도와 신대륙으로 눈을 돌리는 대항해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중국(명나라)은 자연과학을 중시하는 학문풍토가 싹트면서 동아프리카 지역까지 원정에 나섰다. 일본도 고립을 벗어나 바야흐로 외부세계로 눈을 돌리려는 전환기였다. 조선의 세종과 그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좌표 속에서 용틀임하고 있었다.
◎돋보기/개와 매
세종은 세째였다. 원래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장자인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경위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발단은 「개와 매 사건」이었다. 1414년 태종 14년 가을, 양녕은 권초가 좋은 사냥개를 키운다는 소문을 듣고 황상을 보내 강아지라도 구해오라고 했다. 집에는 부인만 있었다. 황상은 명을 어길 수 없어 주인도 없는 집에서 강아지를 덜렁 안고 나왔다. 이 일이 태종의 귀에 들어갔고 당연히 불호령이 떨어졌다.
또 이에 앞서 동생 충녕대군(후일 세종)의 매를 빼앗은 일도 들켰다. 개와 매는 당시에 누구나 갖고 싶어했고 사냥은 무예연마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런데 양녕의 줄기찬 여성편력은 그렇다치더라도 태종은 일마다 이 사건을 들먹이며 세자를 비난했다. 아마도 자기를 닮아 호탕한 양녕보다는 공부에 힘쓰는데다, 무엇보다 덕이 있는 충녕이 수성의 시대에는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같다. 이렇게 해서 장자와 세째의 운명은 달라졌다.
◎주요 연표
△1397년(태조 6년) 4월10일 이방원(후일 태종)의 세째 아들로 출생
△1400년 11월 태종 즉위
△1418년(태종 18년, 22세) 6월 세자로 책봉, 8월10일 즉위
△1419년(세종 1년) 6월 이종무 대마도 정벌
△1420년(2년) 3월 집현전 확장, 영전사 대제학 직제학 직제설치
△1421년(3년, 25세) 3월 금속활자 경자자 완성, 인쇄법 개량
10월 맏아들 향(후일 문종) 세자로 책봉
△1424년(6년) 4월 불교종파를 선·교 양종 36개 사찰로 통합
△1427년(9년, 31세) 2월 박연 편경 제작
△1430년(12년) 2월 농법소개서 「농사직설」 반포
△1432년(14년) 7월 함길도(지금의 함경도)에 경성도호부 설치
△1433년(15년, 37세) 4월 최윤덕 압록강 이북 여진족 토벌
△1440년(22년, 44세) 11월 함길도에 온성군 설치
△1441년(23년) 8월 측우기 제작
△1442년(24년) 3월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 성·보 축조
△1443년(25년, 47세) 12월 훈민정음 창제
△1445년(27년) 10월 세계최대 한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 편찬
△1450년(32년) 2월17일(양력 4월8일) 54세를 일기로 별세
◎세종 어록
『형벌을 삼가고 백성을 사랑하라. 선을 선하게 여김은 길게 해야 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짧게 해야 한다』(1425년·세종 7년 4월19일 임지로 떠나는 관리에게 당부하다)<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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