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와 긴밀 연락,유혈억압 여러측면서 지원/사태전후 본국에 전문… 병력이동 등 사실상 승인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이 신군부와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면서 무력진압에 동조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5·18기념재단(이사장 이기홍 변호사)과 한국정치학회(회장 최상용 고려대 교수)가 5·18 17주기를 맞아 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공동 개최한 「5·18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가톨릭대 이삼성 교수는 이같이 주장했다.
이 교수는 「광주를 통한 한국민주주의에서 유혈통로와 미국의 위치」라는 논문을 통해 『당시 미국은 한국민주화세력에 대한 군부의 유혈억압을 여러 측면에서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80년 5월21일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광주에서 「폭동」과 「무질서」가 확산되고 있다』며 『군부가 상당한 무력을 사용해서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는 것. 같은날 국무부에 보낸 또 다른 전문에서 그는 『광주의 「폭동자」들은 무기고를 부숴 무기를 들었다』고 보고하면서 『한국군대는 오늘밤 군병력을 철수시키고 도로를 차단하면서 두 개의 군사기지와 2,000명의 좌익인물을 가두고 있는 한 형무소를 지키는데 집중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교수는 이어 『글라이스틴은 5·18이 일어나기 11일 전인 5월7일자 전문에서 신군부가 주한미군과 협의하에 학생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제13공수여단과 제1공수여단을 서울지역으로 이동중인 사실을 보고했다』며 군대이동을 미국이 사실상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글라이스틴은 특히 이 전문에서 『한국군부는 미군사령부로부터 포항에 주둔중인 제1해병사단이 대전·부산지역에서 필요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통보받았다』며 『아직 (한국군부로부터) 요청이 없으나 요청을 받으면 유엔사령관은 동의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같은 사실은 당시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이 학생과 시민의 저항을 군대투입을 통해 억압하겠다는 발상을 했으며 구체적인 작전에 관해 신군부와 협의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 「5·18 왜, 어떻게 일어났으며 무엇을 남겼는가」(박광주 부산대 교수), 「광주민주항쟁의 영향과 변화」(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의 논문이 발표됐다.<서사봉 기자>서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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