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기는 언제나 창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21세기를 눈 앞에 둔 오늘도 세기말의 혁명적 변화바람이 지구 곳곳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새로운 세기에 발아할 새로운 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세기 최대의 혁명적 변화가 공산체제의 몰락이라고 한다면 전세기의 그것은 식민주의의 태동이요, 그 전세기는 프랑스혁명, 또 그 전세기는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대변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공산체제가 몰락한 세계에 이제 남아있는 체제는 자유시장 경제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체제 밖에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체제가 사라진 세계에서의 자본주의는 어쩌면 제동장치가 풀린채, 무한궤도 위를 무한속도로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국제화」시대에 있었던 각국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이제 「세계화」라고 하는 무차별적인 무한경쟁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자본주의의 본원적 제어장치로서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도 이와 무관한 일만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탈리아와 인도를 비롯한 몇몇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독재와 부패로 인한 몰락, 일본의 55체제(55년 시작된 자민당의 권력독점체제) 붕괴, 화이트워터사건으로 인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시달림과 지난 수개월간 우리나라를 혼돈속으로 몰아넣은 한보사태, 그리고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대선자금 시비 등은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리라. 이들은 결국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저비용의 국가체제로만 새로운 세기에 적응해 갈 수 있으리라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만한 고비용국가도 이 지구상에 흔치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우선 분단국가인 우리는 엄청난 국방비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통일 비용을 요구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멍에이다.
경제 또한 고비용·저효율구조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단순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높은 물가, 높은 임금, 높은 금리, 높은 땅값, 높은 물류비, 어느 것 하나 해결이 쉽지 않다. 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기름 한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산업구조와 각종 건축물들은 온통 에너지 다소비구조로 얽혀 있다.
사회부문 역시 고비용구조다. 고가품에 대한 선호, 높은 소비성향, 높은 교통사고율과 도로혼잡비용, 그리고 높은 항만적체 비용 등. 교육도 마찬가지다. 때맞춰 갖다 바쳐야 하는 학교선생님에 대한 촌지, 족집게 선생님을 찾아 아이를 맡겨야 직성이 풀리는 과외의 비용 등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사교육비. 그리고 엄청난 생계비(세계 177개 도시중 서울의 생계비는 7위라고 한다)를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비용의 정치구조」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권위주의 정치체제에서 왜곡 성장한 정당과 지도자, 그리고 선거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정치문화의 소산이다. 규율이 엄격한 상시활동의 정당체제, 수십년에 걸친 정치권력의 과두체제, 그로 인한 정경유착, 제로섬 게임과 같은 정쟁, 과열선거,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막대한 안정비용 등.
또 카리스마를 형성·유지하기 위한 지도자들의 품위유지비와 가신을 거느리는 비용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국의 독특한 권위주의 문화속에 용해된채 높은 정치비용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도, 정치도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 기존 메커니즘의 어느 한 부분만을 수리한다고 해서 고비용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없다. 동시적으로 연계된 정책의 선택과 과감한 단행이 있어야 한다.
낡은 틀을 거두고 새로운 틀로 새로운 시대를 짜려고 하는 주체적 의지와 역사적 안목을 가진 새로운 리더십이 확립되고 발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창조적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고비용 국가체제를 극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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