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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누리시라 빌었건만…’/이익섭(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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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누리시라 빌었건만…’/이익섭(아침을 열며)

입력
1997.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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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직장선배로부터 받은 인사장은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백수 누리시라 비는 자손의 간절한 마음 거두어 주시지 아니하시고, 최마리아 양강님은 아흔여섯해만 사시고 훨훨 이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어머님 할머님 부르며 슬픔에 잠겨 할 바를 모르던 저희들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 주셔서 황망중에도 가신 님을 위한 장례절차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우선 지면으로나마 삼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경조사를 끝내고 보내는 인사장은 대개 틀에 박힌 것이기 쉽다. 심한 경우에는 누구한테서 온 것만 확인하면 그만인, 그 내용은 보나마나한 것도 있다. 그 중에서도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인 줄 아오나』는 이제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 된 듯 싶어 거부감까지 일으킨다. 나는 특히 「일일이」라는 표현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국어사전에는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규정돼 있지 않지만 「뭐 그런 것까지 일일이」에서 처럼 「일일이」는 뭔가 하기 귀찮은, 또는 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을 한다는 느낌을 풍기기 때문이다. 또 쓰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쓰지만 받는 사람은 그 인사장이 자기 한 사람에게 쓴 것인 듯한 느낌을 받으면 좋은데 「일일이」는 그러한 느낌을 앗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떻든 조그만 인사장에도 정성이 담겨야 할 것이며, 각자의 개인적인 체취가 풍기면 좋을 것이다. 온통 인쇄로만 찍힌 봉투에 상투적인 인사장, 그것은 결코 진정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아닐 것이다.

그 점에서 선배의 인사장은 가히 파격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게 해준다. 무엇보다 가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환갑을 지난 사람이 아흔여섯의 부모를 여의고 너무 유난스럽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사람을 알 것이다.

최근 나도 여든다섯의 어머니를 여의었다. 한 선배가 문상을 와서 아흔이 된 어머님을 여의고도 애통했던 이야기를 하며 위로해 주었다. 물론 「호상」이라는 말도 위로가 된다. 그러나 그 선배의 이야기가 더 진정이 담긴 이야기로 들렸다. 이별이 늘 그렇지만 나이 드신 부모님을 여의는 일은 더 큰 아쉬움을 남기는 듯하다.

어버이날에는 대개 고향에 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2년전만 해도 누님과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 설악산 가까이 있는 미천골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행사가 되었다. 갑자기 거동이 불편해지셨던 것이다. 그리고 정신도 점차 흐려지셨고 나중에는 가족도 잘 알아보지 못하셨던 것이다.

지금 내 회한은 이 부근에 집중된다. 어머니 편에 서서 지금 저분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가 하는 생각보다는 내 편의 위주로 생활해 왔던 가지가지가 나를 때린다. 나중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잘해 드리라는 얘기를 누구나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정말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지. 한 동료는 병원으로 위문을 갔는데 친구가 자기를 몰라보더라며 그래도 인격체라고 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던진 적이 있다. 부모를 두고도 그런 생각을 하는 수가 있다. 역시 이기적인 생각일 것이다. 마지막에 식음을 전폐하고 눈도 제대로 못 뜨실 때 나는 오히려 이 순간이 더 엄연한 생명체라는 비장함에 쌓여 생명의 존엄성에 새삼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좀더 일찍 소중히 받들지 못했던 회한은 오래오래 가슴을 짓누를 듯 싶다.

주위는 온통 신록으로 눈부시다. 고향에서는 감나무잎이 새 잎으로 윤기를 뽐낼 것이다. 『청천! 청천!』 하였다더니 정말 반들거리는 감나무잎이여, 반짝이는 감나무잎이여! 어머니는 어디로 모시고 가도 감탄을 아끼시지 않으며 흡족해 하셨다. 소금강, 부연, 불영계곡, 대기리, 몰운대와 아오라지, 그리고 미천골. 그런데 금년은 그 아름다운 고향에 갈 일도 없다. 아름다운 풍경들이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그나마 고맙게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야 할까. 어떻든 금년 어버이날은 허전하게 다가오고 있다.<국립국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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