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서 같은 시적 담론들이창기의 「이생이 담안을 엿보다」는 제목처럼 재미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의 유연하고 탄력적인 언술방식을 물론 재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시인은 관습화한 시언어를 비틀고 무거운 관념은 공중으로 가볍게 날려 보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정교한 기교들이 눈물겨운 것처럼, 그 깊은 의미에서 발랄한 시적 재치도 약간의 슬픔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감상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재치가 이 곤고한 세속적 삶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가령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코카콜라처럼/ 날뛰고 있구나」와 같은 가벼운 표현들은 그저 가볍지 않고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하는 서늘한 인식을 동반하고 있다. 그의 직유들에는 이렇게 신산한 세간의 삶이 들어 있다. 「망한 출판사에서 펴 낸 헌 표지 같은 얼굴」, 「나는 잠들어 있다 지친 여급처럼/ 더 이상 토할 것이 없다는 자세로」, 「밤이슬에 젖은 불온 삐라 같은/ 오르지 못할 나무들의 군락」, 「꿈결에만/ 식구들과 자유자재로/ 어두운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저 지친 날개 같은 지붕들!」 같은 표현들은 때로 깊은 숨을 쉬게 만든다.
그러나 이 시집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시적 화자의 실존적 장면을 환유적인 구성으로 편집한 몇 편의 시들이다. 이 시집의 장 안에 편입되지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진술서」, 표제작인 「이생이 담 안을 엿보다」, 그리고 그림이 삽입된 「오래 된 벽화」 등과 시집의 첫 표지에 적힌 그의 「연보」 등을 보자. 이런 시적 담론들은 자신의 실존적 궤적에 대한 진술서와 같다. 물론 그 진술서는 진술서이기 때문에 기억의 문법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진술서는 자신의 삶을 서사적으로 재현하거나 그것의 불가피성을 변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 내부의 실존적 장면을 살아있는 이미지로 현재화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장면 그 자체를 편집하여 제시하고, 그 장면의 숨은 의미를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생」의 내밀한 장면을, 그 실존의 「담 안을 엿본」다는 것은 얼마나 서늘한 일인가. 마치 차마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읽는 것처럼.<이광호 서울예전 교수·문학평론가>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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