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니는 딸까지 생일에는 분위기가 좋은 식당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일에 남편이 데리고 간 곳은 꼬리곰탕집. 땀을 뻘뻘 흘리며 꼬리뼈를 빨고 있으려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용하지? 전번의 그곳과는 다르지?』라는 남편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지난번 아들의 생일에 우리는 모처럼 미국에서 들어온 꽤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시끄러운 음악과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뛰어돌아다니는 어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는 엄마들의 북새통 속에서 먹는둥 마는둥 나왔다.사실 나도 큰 애가 어릴 때는 열심히 떠 먹였다.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가면 오랜만에 모인 애들은 음식에는 관심없이 흥분해서 뛰는데 우리 젊은 엄마들은 저마다 밥 그릇 하나씩을 들고 아이들 떠 먹이느라 식은 음식 먹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한참 걸려 겨우 선심 쓰듯 몇 숟가락 받아 먹은 큰 애는 늘 집에 돌아와선 얄밉게도 『엄마, 밥』, 그 버릇이 7살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낳은 딸애는 다른 식으로 키우기로 했다. 손으로 음식을 입에 가져갈 즈음이 되자 목에는 턱받이를 해주고, 의자 밑 방바닥에는 음식이 흘러도 괜찮게 깔개를 깐 뒤 손으로 집어먹어도 될 만큼 조그맣게 준비한, 김에 싼 완자만한 밥, 찐 완두콩, 마카로니 국수, 닭고기 등을 주었다. 물론 반은 먹고 반은 흘렸지만 딸애도 몹시 즐거워했다. 하루는 어린 것이 손으로 집어먹는 것도 힘들었는지 내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스파게티 국수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지나쳤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눈과 손가락을 집중시켜 먹는 동안에 저절로 제 나이에 맞는 심신의 운동이 되었을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밥을 먹고 난 뒤 애는 씻기고 식탁과 바닥은 치우면 될 것을 큰 애 때는 그렇게 묻히는 게 싫어 아예 물수건을 준비해두고 닦아주며 먹였다. 생각해보면 아이를 위한 것보다는 내가 편하자고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원시인처럼 먹던 딸애는 크면서 적어도 식사예법으로 남에게 혐오는 주지 않는 숙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한 자리에 앉아서 차분히 제 손으로 먹게 하는 것이라는 걸 왜 큰 애때는 몰랐을까.<옥명희 소화출판사 편집부장>옥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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