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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치아프게 하는 어른들/정채봉 샘터사 주간(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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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치아프게 하는 어른들/정채봉 샘터사 주간(아침을 열며)

입력
1997.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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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부끄러운 어른들 추한 모습/너희는 자라서도 자존심을 세워라며칠전 일이다. 한 초등학교의 담밑 길을 걸어오는데 도로에 차를 마주 세운 사람들끼리 시비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하교시였는데 학교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몰려들어 구경들을 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거침없이 육두문자까지 쏘아댔다. 그냥 지나치던 나는 형제인듯한 아이 둘이 걸어가면서 하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온 『형, 어른들 정말 머리 아프게 한다. 그치?』하는 말소리가 귓속을 화끈하게 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얘들 대화에 끼어들어서 『너희들을 머리 아프게 하는 어른이 전체가 아닌 일부』라고 설득하고 싶었지만 요즘 청문회다 뭐다하면서 낱낱이 보도되고 있는,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까지의 총체적 추태가 생각나자 그나마의 자존심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속마음으로 「너희가 어른이 될때는 자존심 세워서 사는 시대이기를」하고 바랄 뿐.

우리의 미래에 있어서 유일하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들라고 하면 나는 두말 않고 「어린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샘에 이제 막 흘러드는 새물인 이들에게 윗물인 어른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꽁지빠지게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다. 그중에서도 「거짓말」에 대해선 할 말이 없게 된 현실이 아닌가. 멀쩡하게 손바닥들고 「선서」라는 것을 한 어른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보라.

한 스님의 방 벽에 어린이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림 속의 아이들은 희희낙락거리면서 무엇인가를 떠메고 가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이 무엇을 떠메고 가고 있습니까』라고 스님에게 물었더니 『아, 꽃 아닙니까. 아이들이 떠받치는 황제는 저런 꽃들인데…』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놀랍다고 하자 스님은 무심히 대답하셨다. 『아이들은 직지직심이지요』 그날 밤에 나는 그 산사에서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이런 우화 한 편을 썼다.

『언덕 위에 궁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궁전에서는 며칠전부터 황제의 등극행사를 한다고 분주했다. 여러 곳으로부터 영향력 있다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마침내 황제 등극일이 밝았다. 성위에는 애드벌룬이 두둥실 떴고 조율하는 나팔소리도 북소리도 났다. 성 밖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목을 빼고서 새 황제를 보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언덕위의 궁전문이 활짝 열렸다. 쿵쿵쿵 예포가 쏘아졌고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나타났다. 기수들이 바다그룹, 육지그룹, 산림그룹 등 유수한 그룹들의 기를 들고 지나갔다. 비로소 황금빛이 번쩍이는 옥좌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옥좌를 정치 사회지도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빙 둘러서 메고 있었다. 키가 커서 옥좌를 본 어른들이 수군거렸다. 「맞아 우리들의 황제님이 틀림없군」 「저 황제님만 있으면 세상에 안되는게 없지」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들이 앞을 가리고, 키 또한 작았기 때문에 황제가 누구인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옥좌의 뒤를 좇는 이상한 행렬만이 보였다. 손을 묶이고 발에 족쇄를 찼으면서도 배를 내밀고 으스대며 가는 포로들. 그 가운데는 학자도, 언론인도, 종교인도 섞여있었다. 행렬이 저만큼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그제야 아이들은 옥좌 위에 앉아있는 황제를 볼 수가 있었다. 한 아이가 소리질렀다. 「저건 돈이라는 종이 아니냐?」 다른 아이들도 킬킬킬 따라 웃으며 말했다. 「저런 종이가 어찌 황제가 되지?」 「글쎄말이야. 웃기는 어른들이지」』

이 우화는 여기서 끝난다. 물론 주제는 돈이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시선이다. 아이들은 그 작은 눈으로 큰 눈을 가진 어른들보다 더 깊고 중요한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어른들의 눈바꿈이 진실로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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