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박석태(59) 전 제일은행 상무의 빈소를 찾은 주변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스스로를 변호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억울함을 함께 애통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보사건과 관련, 더 밝혀야 했을 이야기들을 끝내 무덤까지 안고 간데 대해서는 일말의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박씨는 모두 재원으로 불릴만큼 잘 성장한 1남4녀의 아버지로서 평소에도 남다르게 가정을 아꼈다. 더구나 사시에 합격, 검사시보로 근무중인 둘째딸은 올해 결혼식이 예정돼 있고 마흔이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은 최근 입대, 어엿한 성인이 됐다. 박씨는 또 전남 무안 고향의 팔순노모를 매주 문안갈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굳이 화장을 요구했던 것도 자신의 죽음이 씻을 수 없는 불효가 되리란 것을 인식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자살을 죄악시하는 천주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이같은 정황 때문에 은행동료를 포함한 주변사람들은 박씨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이유를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박씨의 짧은 유서는 그가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유서 말미에 「1997·4」라고만 돼 있을뿐 날짜가 명기돼 있지 않은 것은 자살 당일 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즉 미리 써놓은 상태에서 한동안 「결행」을 망설였다는 추정이다. 유서 앞부분은 행간을 두고 또박또박 씌어 있었던데 반해 은행상사와 청와대 비서관,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거명한 뒷부분은 나중에 끼워쓴 흔적이 뚜렷한 것도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현재로서는 박씨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수치심과 좌절감이 평소의 냉정한 판단력까지 마비시켰으리라는 것 외에는 그의 자살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박씨가 죽음보다는 차라리 한보대출에 얽힌 비리구조를 숨김없이 밝힘으로써 자신과 가정, 사회까지 지키는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정진황 기자>정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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