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등의 개혁개방정책 비판/89년 천안문 조자양 실각 주도26일 95세를 일기로 사망한 펑전(팽진)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끈 「8대원로」중 한 사람으로 중국의 급속한 경제개혁을 반대해 온 강경보수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덩샤오핑(등소평)이 현대중국의 개혁·개방의 기수였다면 팽은 급속한 시장개방의 고삐를 죄는 보수파의 대변자였다.
팽과 등은 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됐다가 78년 마오쩌둥(모택동) 사망이후 복권된 뒤 정치적 명운을 함께 해왔으나 개혁·개방의 속도를 둘러싸고 끝임없는 이견을 보였다. 팽은 88년 공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등과 마찬가지로 중국권부에서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확보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동풍(사회주의)이 서풍(자본주의)을 압도한다』는 팽의 연설은 정통사회주의자들의 모토가 됐다. 팽은 80년대말 개혁·개방론자인 후야오방(호요방), 자오쯔양(조자양)을 밀어내는데 핵심역할을 했으며 89년 천안문사태 당시 군동원에 지지를 보였다.
1902년 산시(산서)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팽은 23년 중국공산당 청년엘리트 청년단에 가입,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했다. 49년 공산정권 수립후 팽은 당비서가 됐고 이어 베이징(북경)시장 전인대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58년 모주석이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자 『모주석이 객관적 경제발전법칙을 위배하고 있다』고 주장, 비판을 받았고 65년 『진리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돼 이듬해 문화대혁명때 숙청, 9년간 옥고를 치렀다. 79년 복권된 뒤 전인대위원장, 정치국원을 역임했으며 83년에는 전인대상무위원장에 올랐다. 차오스(교석) 전인대상무위원장, 웨이젠싱(위건행) 베이징시 당서기가 그가 키운 인물이다.
팽의 사망으로 이제 「8대원로」에는 양상쿤(양상곤·89) 전 국가주석과 보이보(박일파·88) 전당고문위 부주임만이 남게 됐다. 군부내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양이 살아있지만 순수공산주의자로서 당·정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팽의 영향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윤태형 기자>윤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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