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낯설지 않지만, 「에이즈문학」이라는 장르는 비교적 생소하다. 구미에서 근년들어 시작된 양식이다. 소설과 자전적 이야기 형식으로 발표되고 있는 에이즈문학은 어느날 느닷없이 다가온 불행과 예고된 죽음의 그림자, 주변 사람들까지 좌절케 하는 비통한 체험, 생사의 수수께끼 등의 소재를 끌어안으면서 삶과 문학에 대한 종래의 관점을 뒤엎는다.에이즈 자체가 그러하듯이, 에이즈문학은 세기말적 현상으로도 해석된다. 1세기 전, 당시의 불안했던 세기말적 정서를 대표하던 문학중의 하나로 「장미소설」이 있다. 이탈리아의 시인·소설가·극작가였던 가브리엘 다눈치오가 발표한 소설 「죽음의 승리」가 그것이다. 퇴폐적 정서속에 파격적인 정사를 다룬 이 유명한 소설에 작가는 「장미소설」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세상의 의미는 소설로 함축되고, 소설을 읽으면 거칠고 무질서한 사회의 본질이 보인다. 우리 문학에도 세기말적, 혹은 장미소설적 현상이 일고 있다. 92년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에 이어 현재 법정에서 예술인가, 음란물인가 하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그 예이다. 비난여론을 못 이겨 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회수·파기하기는 했지만, 내용은 중년 남성과 여고생의 적나라한 정사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청문회」라는 이름의 범죄소설, 또는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셈이다. 범죄소설은 통속적이기는 하지만, 난해한 복선적 구성을 통과해 나름대로의 도덕적 결말에 이른다. 구성이 치밀하고 추리가 예리할 때 범죄소설은 만족스런 독후감을 주고, 그렇지 못할 때 시간만 낭비한 듯한 허탈감을 남긴다. 「청문회」라는 소설도 거의 끝나가는데, 우리에게 오는 독후감은 어떠한가. 청문회는 통속적이나마 교훈을 주고 있는가. 세기말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맞을 최소한의 도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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