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노동당비서가 남한에 온 것은 남북분단사에 큰 사건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또 어쩌면 그의 탈출 자체가 북한 붕괴의 한 서곡으로 후일 평가될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희망대로 그의 탈북입남이 남북통일에 기여가 된다면 다행이겠고 그래서 국민들은 그를 전범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만만찮기는 하지만 대체로 큰 저항감 없이 맞이한다.그렇더라도 황씨에 대해서는 입국객에게 방역 검사하듯 일단 검증할 것은 할 필요가 있다.
황씨가 입국후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도착하던 날 공항에서의 성명과 간단한 기자회견, 그리고 국립묘지를 참배했을 때 방명록에 적은 몇마디 정도다. 여기에 나타난 그의 자세를 분석해 볼 만하다.
황씨의 도착성명은 면밀한 계산과 용의주도한 배려로 신중히 조탁된 것일 것이다. 이 성명에서 그는 『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 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체제로 변질되었으며…』 『이같은 사태는 북조선 정권의 그릇된 정책이 빚어낸 후과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을 비판하되 그것은 북한이 사회주의를 변질시켰기 때문이란 말이지 사회주의 자체의 모순 때문이란 말은 없다.
또 이 성명에서는 『북조선은 개혁개방을 비사회주의 길이라고 견결히 배격하고 있으며… 북조선 당국이 남조선 혁명노선을 버리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 줄 것을 진심으로 호소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구하되 무력통일의 혁명노선을 버리라고 했고 개방이 사회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했지 사회주의 자체를 포기하라는 말은 또한 없다.
황씨의 사죄부분에 있어서는 도착성명에서 『나는 이미 민족 앞에 큰 죄를 지었으며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했고 국립묘지의 방명록에 『민족 앞에 지은 죄를 씻고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썼다. 이 「민족 앞에 지은 죄」가 무슨 죄인지 명시하지 않아 주체사상의 과오까지 포함되는지 불분명하고, 그 사과는 민족 앞에 하는 것이지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요 그 충성은 민족 앞에 맹세하는 것이지 대한민국에 맹세한다고 하지 않았다.
서울 도착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망명」이냐 무엇이냐를 묻는 질문에 황씨는 『나는 갈라진 조국의 한 부분만을 조국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망명이다, 귀순이다 하고 말하는 것은 나하고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도착성명에서도 『나는 이번에 갈라진 조국의 북을 떠나 남으로 넘어오게 되었다』고 말해 망명이란 뜻을 피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황씨의 입장을 보면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이나 주체사상을 아직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어디에도 사상적 전향의 언급이 없다. 주체사상 자체의 실패를 시인하지도 않았다. 자기 사상이 북한에서 변질된 데 대한 항의가 있을 뿐이다. 그의 「망명」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황씨가 미전향자라면, 그래서 그의 한국 입국이 망명도 귀순도 아니라면, 그를 맞이하는 한국 국민의 심서는 매우 곤혹스러워진다. 미전향자를 북한을 탈출했다는 이유만으로 환영해야 할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자유대한의 품이 넓다 해도 주체사상의 핵심을 품속에 품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항장은 불살이라지만 이것은 항복이 아닌 것이다.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 앞에 사죄한들 한국 국민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조국이나 민족이란 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것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성스러운 말들이 아무나 그 그늘에 숨어버리는 편리한 피난처일 수 없다. 빠져 달아나는 둔사로 이용당하기 위해 있는 조국도 민족도 아닌 것이다.
황씨는 자신의 분명한 사상적 입장을 기회있을 때 밝혀야 할 것이다. 그가 주체사상을 정립한 장본인이고 보면 그 사상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옳다. 그는 『전쟁을 막으러 왔다』고 했다. 평화통일을 위한 그의 노력이 귀순자의 입장인지 아니면 중재자의 입장인지를 알고 싶다. 남행의 직접적인 동기가 석연치 않은 마당에 그의 어정쩡한 태도는 불신을 조장하기 쉽다.
사상의 통일없이 국토통일은 없다. 황씨가 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방법이 어떤 것이든 자신의 사상의 정리 없이는 어렵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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