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이균영(소설평)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이균영(소설평)

입력
1997.04.26 00:00
0 0

◎행복의 새로운 가능성그런 시절이 있었다. 수 많은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줄줄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던 시절, 더러는 식구들의 눈물 젖은 전송을 받으며 더러는 남몰래 줄행랑치듯 고향집을 떠난 그들은 서울에 가면 인생이 달라지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설레이었다. 감나무집 만복이, 대추나무집 순자 이상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객지에서 겪게 될 지 모를 모든 고난의 예감을 압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들의 기나긴 상경행렬을 떠올리면 낡은 사진첩을 뒤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들을 사로잡은 자아 발전의 욕망은 옛날 얘기가 아니다. 갈수록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가는 고시생들, 경향 각지의 미인대회에 몰려다니는 처녀들, 토익 공부로 새벽잠을 설치는 회사원들, 그들은 결국 형태만 바뀐 젊은 상경민이 아닌가.

이균영 소설집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의 표제작은 자아 발전이라는 현대 한국인 공통의 욕망에 대해 진지한 사색을 펼친다. 작중 화자 석우는 정년을 앞둔 노련한 기관사다. 그가 몰고 있는 기차는 고향에서 광부로 평생을 살게 되었을 지도 몰랐던 그에겐 특별한 것이다. 철로는 그의 또래 젊은이들에겐 보다 나은 삶을 향한 통로, 지금과는 다른 자아에 대한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회한을 남기고 사라진 옥순은 바로 철로의 상징에 속절없이 붙잡힌 인물이다. 탄광촌에서 탈출하기를 꿈꾸던 그녀는 석우를 배신하고 부유한 사내의 첩실이 되어 서울로 떠나고 자신의 불행을 괴로워하면서도 석우 곁에 머무는 대신 디자이너의 길을 찾아 해외로까지 나간다.

「나뭇잎들은…」에서 석우의 회고가 알려주는 것은 사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이 지니고 있는 무제한적 성질이며, 그것에 휘돌린 인간의 허망한 부유성이다. 철로 위에서 반생을 보낸 사람답게 석우는 철로의 미혹에서 자유로운 원숙한 지혜를 피력한다.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행복은 도박이나 모험과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의 상념은 특히 사람살이의 의미를 장구한 시간 속에서 헤아리는 관점에 실려 무게를 얻고 있다. 작품에서 억겁의 세월이 퇴적된 결과로 불빛을 발한다고 묘사된 석탄은 토착적, 역사적 삶에 대한 긍정을 담은 드물게 아름다운 이미지다.

이렇게 하여 이균영의 소설은 좁게는 출세주의에 대한, 넓게는 사회적, 지리적 이동이 바로 인간 행복의 새로운 가망으로 통하는 현대 전체에 대한 반성이 된다. 이만한 사유의 깊이를 지닌 작가가 한창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다니 한국소설은 불운하다.<황종연 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