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이들이 속썩이는 것도 아니고 시부모와 사이도 괜찮건만/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두통·불면·식욕부진에 까닭모를 설움과 답답함/경제수준·나이에 관계없이 ‘마음의 병’ 우울증이 평범한 가정주부들에게 시나브로 확산되고 있다왠지 우울하다. 남편이 특별히 속을 썩이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도 잘 자란다. 시어머니와 불편한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도 가슴 한 구석이 늘 비어 있고 까닭모를 설움이 밀려 든다. 존재의 근원을 따지는 철학적 고뇌를 하는 것도 아닌데….
주부 우울증이 위험 수위를 넘어 서고 있다. 부유한 중년 주부의 사치병쯤으로 여겨지던 주부 우울증이 경제 수준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퍼져 나가고 있고 증세도 한결 깊어지고 있다. 고부갈등이나 남편의 외도 등 특별한 문제로 우울증에 빠진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원인이 분명해 해결책도 의외로 쉽사리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주부들 사이에 우울증이 번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취재팀이 우울증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서울 강남 P정신과 의원을 찾았을 때 부유한 차림의 40대 부부와 30대 주부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후 수수한 차림의 40대 주부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환자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취재팀은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 이들의 사연을 물어 보았다.
전업주부인 A씨(48)는 남편이 대기업 이사이다. 20여년을 남편과 외아들 뒷바라지를 해 왔다. 아들이 지난해 명문 대학에 합격하고 난 후 걱정거리가 없어지면서 우울증이 찾아 들었다. A씨는 의사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남편과 아이가 저녁밥을 먹고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어요. 혼자 밥먹는 게 싫어 밥을 자주 거르게 됐지요. 밤잠도 안와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내다 보니 늘 머리가 아팠습니다.
하루는 저녁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가다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쌀을 씻는데 구역질이 났고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는데 가슴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아파 부엌칼을 바닥에 떨어 뜨렸습니다. 칼을 주으려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왈칵 울음이 터졌어요』
A씨는 남편에게 얘기해 아침에는 에어로빅 센터, 오후에는 운전교습학원에 다녔다. 「기분 전환이 되겠지」하는 생각과는 달리 텅 빈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이 콱 막혔다. 두통과 불면증도 계속됐고 몸 여기 저기가 쑤시고 결렸다. 남편과 아들에게 고통을 호소했지만 『병원에 가 보라』는 말 뿐이었다. 야속했다. 『바보처럼 참기만 하고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기만 하고 살다보니 안으로 골병이 든 것 같았고 괴로움을 알아주지 않는 남편과 아들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A씨는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 놓았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편이 A씨를 병원에 데려 왔던 것.
병원측은 『A씨의 우울증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에서 비롯했다』며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스트레스가 몸속에서 신경성 질환으로 옮겨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담당 의사는 A씨와 함께 남편과 아들도 병원에 불러 치료를 하고 있다. 하지만 A씨가 완전히 회복될 지, 회복되더라도 가족과의 관계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B(32·주부)씨는 서울대 동창인 남편과 함께 미국에 유학했다. 자신은 석사학위만 취득한 뒤 박사 과정을 밟는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박사학위를 따지 못해 평소 바라던 교수가 되지 못하고 일반회사에 취직했다. 남편은 직장생활에 만족하는 모습이었지만 B씨는 못마땅했다.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를 반복했고 불면증과 두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식사 준비를 거의 하지않고 빨래나 집안 청소도 내팽개쳤다. B씨의 우울증은 딸(7)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딸의 성적이 최하위권을 맴돌고 말수도 줄었다. 남편은 딸아이조차 행동이 이상해지자 모녀를 병원에 데려 왔다.
담당의사의 견해는 이랬다. 『남편에 대한 실망이 이유였습니다. 그런 남편을 택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울증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 거죠. 1년여 치료를 해 왔는데 딸은 많이 나아졌지만 B씨는 별 차도가 없습니다. 3년 이상 방치한 때문입니다』
앞의 두 주부와 달리 C(42)씨는 이날 처음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 남편은 말단 공무원이고 1남1녀는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종합진단을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어 정신과를 찾았다는 C씨가 의사에게 밝힌 증상도 A, B씨와 비슷했다. 『몇달전부터 가슴이 답답해요.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고 여기저기 아프고 입맛이 없습니다. 잠자기도 어렵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C씨도 결국 남편과 자녀의 태도와 본인 성격이 문제였다. 남편과 대화는 점점 줄어 들고 자녀와도 세대차가 두드러져 소외감을 느끼게 된 것. 의사는 C씨에게 『남편과 다시 오라』고 주문했다.
이 병원 P원장은 『치료중인 20여명의 주부 우울증 환자 가운데 대부분이 가정에서의 소외감, 빈부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결혼후 환경변화 부적응 등이 주원인』이라며 『아직도 우울증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게 무슨 병이냐, 기분 한번 풀면 되지」라는 주변 인식이 주부우울증 환자를 양산케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대개 장기간 방치돼 병이 깊어진 상태』라며 『우울증을 방치하면 자칫 파국을 부를 수도 있어 조기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당신의 정신은 건강합니까/감정표현 숨기는 사회분위기 영향/권태·정서불안 등 자각증상 못느끼는 ‘가면우울증’ 많아
아이들에 온갖 정성을 쏟는 일등 엄마, 남편의 뒤치다꺼리에 인생을 건 만년내조자, 직장과 가정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는 슈퍼 우먼….
남들이 부러워 할 이런 모습의 당신이라고 우울증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정신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고 있는 당신의 머리맡에 이미 우울증의 적신호가 켜져 있는 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는 흔히 가면을 쓴다. 『나를 제일 모르는 게 나』라는 말은 우울증에 정확히 들어 맞는다.
우울증은 신경정신과 질환이지만 여러 가지 신체적 증상을 동반한다. 대개 자기 혐오와 권태, 무기력, 우울 등 심리적 증상과 함께 불면증과 소화불량, 만성피로, 성욕 감퇴 등을 함께 나타낸다. 또 심리적 증상은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신체적 불편만 호소하는 우울증 환자도 많다. 소화불량이나 신체 한부분의 심한 통증이 나타날 때까지 자신의 우울한 심리상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 불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많은 경우 의식적으로 자신의 우울한 심리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자는 대개 『정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거나 『몸이 안 좋다 보니 심리적으로도 좀 불안해진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의학계에서는 이런 증상을 「가면 우울증(Mask Depression)」이라고 부른다. 직접적인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나라에는 서구보다 가면 우울증 환자가 훨씬 많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 온 30대 이상 여성은 더욱 심할 수 밖에 없다. 설사 감정을 드러내더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의 벽에 부딪히게 되리라는 점을 이들은 알고 있다.
『기분이 몹시 울적하다』는 말을 들은 남편이 산더미같은 집안일을 해 줄 리는 없다. 오히려 『팔을 못 움직일 정도로 어깨가 아프다』고 말하면 아이들에게 도시락 대신 점심값을 쥐어 줄 변명은 된다.
그러나 우울증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병이다. 마음에 메스를 대지 않고는 우울증을 치유할 수 없다. 또한 마음의 병이 낫지 않고서는 신체적 증상이 사라질 리가 없다. 굳게 닫힌 환자의 마음을 열어 주고 가면을 벗겨야 한다. 주위의 관심과 따스한 사랑이 열쇠가 되고 메스가 된다.<김경화 기자>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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