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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고 역사앞에 서라/강만길 고려대 교수·사학(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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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고 역사앞에 서라/강만길 고려대 교수·사학(아침을 열며)

입력
1997.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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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을 품고 성립된 문민 김영삼정권이 임기를 불과 10개월여 남겨놓은 시점에서 한보사건을 계기로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다. 정권위기 차원을 넘어 국가위기로 보일 만큼 심각한 지경에 빠졌다고들 말한다. 성립초기에는 의미있는 개혁들을 단행함으로써 과연 문민정권답다는 칭송을 받던 김정권이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된 원인은 물론 후세사가들에 의해 상세히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사는 연구자에게도 어느 정도는 보이기 마련이다.김정권의 취약점은 무엇보다도 문민정권이면서도 군사정권을 뒤엎고 성립된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타협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취약점을 메우기 위해 군사정권들이 하지 못한 몇가지 개혁들을 단행하고 그 통치권자들을 감옥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문민 김정권의 탯줄은 정경유착이 고질화했던 30년 군사정권과 어쩔 수 없이 이어져 있어서 스스로도 그 올가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문민정권의 최고통치권자를 비롯한 권력의 핵심들이 비록 야당을 했다해도 정경유착이 만연했던 군사정권 시기에도 정치를 했고, 더구나 그런 군사정권과의 타협 속에서 정권이 성립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원죄」를 가지고 성립된 정권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거나 씻기라도 하듯 『한푼도 받지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짊어진 「원죄」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고 권력 누수현상이 심해서 문민정권의 역사성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번 다시 기회가 없는 단임제 정권으로서는 지금부터라도 추호의 숨김도 없이 발가벗고 역사 앞에 나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 난경을 오히려 30년 고질의 정경유착을 가차없이 청산하는 기회로 삼고, 그것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는 결심이 중요하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란 말이 있다. 하나의 정권이 역사 앞에서 죽지않고 사는 길은 육친의 정까지를 포함해서 사사로운 정이나 이익을 가차없이 죽이고 오직 공인으로서의 길만을 걷는데 있다. 특히 정권담당자로서는 제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겪으면서 역사 앞에 서는 길, 그것만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알아야한다.

김정권의 또 다른 취약점은 이대로 임기가 끝나면 문민정권이면서도 군사정권들보다 민족문제 즉 남북문제에서 오히려 업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 원인을 가까운데서 찾으면 회담에 합의했던 한쪽 정상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있는 것 같지만, 좀 더 근원적인 데서 찾으면 권력의 핵심이 50년대식 대북인식 내지 민족인식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 될 것이다. 특히 조문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태우 정권이 이루어 놓은 92년의 남북합의서는 분명히 일방적 흡수통일이나 우위통일을 부인하고 남북 대등통일을 약속한 것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다른 한쪽이 무너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합의서정신에 따라 대등통일로써 민족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쪽으로 돌아선다면, 아무리 풀기 어려운 남북문제라 해도 미국에게 맡겨놓다시피한 4자회담 뿐만 아닌 또 다른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정권책임자는 흔히 역사의 정직성이나 엄숙성을 말하고 그것으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적 이익이나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정도를 못걷기 마련이다.

역사적 평가는 결코 어수룩하지 않다. 그러나 제 살을 도려내면서 역사 앞에 나서면 그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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