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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봄의 시정 그 무구함/황동규씨 10번째 시집 ‘외계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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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봄의 시정 그 무구함/황동규씨 10번째 시집 ‘외계인’ 출간

입력
1997.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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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징하게 다듬은 글속엔 등단 40년이 지났어도 소년의 호기심이 가득「숫봄, 숫봄! 혼자 김포 들을 질러 달려왔다/ 공연히 검색하려 드는 순경 때문에 기분 좋아/ (나를 수배자들처럼 젊게 보다니!)/ 양옆에 노랑색 쏟아놓은 길을 내처 달렸다」(「외계인2」중에서)

숫봄에, 황동규(59) 시인이 10번째 시집 「외계인」을 내놓았다(문학과지성사 간). 58년 「즐거운 편지」가 현대문학에 추천돼 등단한지 꼭 40년만이다.

삼십여년전 「몸 한구석에 감출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김해에서 화천까지/ 도처철조망 개유검문소」 (「태평가」중에서)의 조국을 떠돌았던 그. 이제는 흐른 세월에 검문하려는 순경을 보면 「나를 수배자들처럼 젊게 보다니!」하고 은근히 기분 좋아하며 여행길을 재촉하는 나이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시를 특징지우는 것은 천진하다 할 정도로 명징하게 조탁된 언어들이다. 읽는 이들의 마음 속에 자신의 시구처럼 「질탕한 곡선 하나를 그어주는」 언어들이다. 거기에는 「달관을 맛본 자의 포즈라기보다는 세계를 처음 발견한 소년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문학평론가 이광호)이 숨겨져 있다.

「지난 몇 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빗소리/ 아침부터 시작해서 낮을 보내고/ 오후에도 잊힌 듯이 내리는 빗소리/ 오늘은 연구실 창밖 까치집을 적시고/ 그 밑에 새로 준공한 아랫집도 적시고/ 보이지 않아도 몸 뒤척이는 까치 새끼들/ 바알간 발톱까지 적시고/ 발톱에 묻은/ 거미줄 남은 한 가닥까지 적시고/ 더 적실 것이 없어/ 그만 맥을 놓아버린 빗소리/ 발 하나쯤/ 시간 밖으로 내어놓은 빗소리」(「꿈의 꿈」 전문)

창밖에 내리는 빗방울에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고, 거기에서 「더 적실 것이 없어 그만 맥을 놓아버린」 「발 하나쯤 시간 밖으로 내어놓은」 빗소리를 듣는다.

이번 시집에 실린 여러 시편들에서는 특히 「큰 대자로 누워」 버리고 싶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눈에 띈다.

「노량서 시작한 술 끝내니 통영/ 한려수도를 마음 속에 넣고 놀았구나/…/ 바다 위에 큰 대자로 누워 나는/ 알맞게 어두워 「내」가 안보일 장승포로 가겠네」(「봄바다에서」중에서). 나를 잊고 자연에, 세계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은 시집의 표제작 「외계인」에서는 한층 경쾌하게 나타난다. 겨울에 내리는 눈, 눈에 찍힌 새 발자국, 길 건너는 개 한마리 등의 평범한 사물이 시인에게는 모두 마치 외계인이 보는 것처럼 낯설고 신기한 모양이다. 세계는 그에게 「걷다가 사라지고 싶은 곳」이다. 「여름내 채소 자라던 자리에/ 벌렁 뒤로 한번 넘어졌다/ 눈 위에 큰 대자를 찍었다/ 일부러 또 하나 찍었다/ 다섯 개나 찍었다/ 허전한 자리에 하나 더 찍었다/ 내일쯤 눈 위에 큰 대자 암호 보거든/ 그대 농장에서 한 시간쯤 살다 간/ 외계인의 자취임을 알아다오」(「외계인1」중에서)

이런 시인의 무구함이 가 닿는 끝은 어디일까.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방파제 끝」 전문)<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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