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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노인 따뜻하게 맞자/이상우 서강대 교수(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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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노인 따뜻하게 맞자/이상우 서강대 교수(특별기고)

입력
1997.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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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그 자체가 할 이야기 다 한 셈/정보 얻으려기보다 자기성찰 시간을일흔 넷의 지친 동포노인이 20일 마침내 서울에 왔다. 영혼도 몸도 지쳐 50년의 방황을 마감하고 조용히 쉬러 왔다. 탕아의 귀가엔 이유를 묻지않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 우리내 풍습이다. 어설픈 지식으로 북한 공산당 지도자들을 현혹하고 거짓을 창조하여 불쌍한 북한동포들을 김일성교도로 몰아가는데 앞장섰던 김일성교의 으뜸가는 사제 황장엽 노인이지만 그 죄를 묻지말고 따뜻이 맞아주자. 그리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도록 해주자. 자기가 저지른 민족에 대한 죄는 스스로 참회하게 내버려두자.

황장엽은 학자출신의 정치인이다. 모스크바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던 교수임과 동시에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당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의장, 당비서, 국제부장 등을 두루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황장엽은 북한사회를 레닌주의국가에서 김일성 숭배의 종교국가로 탈바꿈하는 교리를 만들어 낸 장본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위대한 수령님을 영원히 모시고 대를 이어 싸워 나감으로써 조선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자』고 주장하면서 앞장서서 소위 주체사상이라는 교리를 체계화 해왔던 사람이 바로 황장엽이다.

황장엽의 북한탈출은 두가지 점에서 북한에 큰 아픔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는 북한의 정신적 지주의 붕괴를 촉진 했다는 점이다. 집을 지은 사람이 뛰쳐 도망 나온다는 것은 그 집이 곧 허물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북한은 철저한 이념국가이다. 그 이념의 혼이 빠져 나갔다면 북한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얼」이 빠진 종교국가가 얼마나 더 존속하겠는가. 북한 지도자들의 허탈감은 클 것이다.

둘째로 황장엽은 정치적 거물인데 이런 거물이 북한을 떠났다는 것은 북한이라는 배가 곧 파선하리라는 징후라고 북한주민들은 이해할 것이고 이에 따라 사상적 동요가 일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항해사가 배를 버리고 구명정을 타고 탈출했다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승객들은 어떤 생각을 가질까.

「황장엽 사건」은 북한의 사건이지 우리의 사건은 아니다. 황장엽이 북한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의 핵심이다. 황장엽이 그 뒤에 어느 곳에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갈 데가 마땅하지 않아 말이 통하는 고향 땅 한국을 택하여 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대목이 아니다.

서울에 온 황장엽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간단히 나의 소견을 적는다.

첫째로 한 해외동포의 귀향 이상으로 생각 하지 말아야 한다. 황장엽의 귀향에다 이런 저런 정치적 의미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황장엽은 이미 생각한 바 있어 북한을 탈출했다. 그 행동 자체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한 셈이다. 구차스럽게 다시 탈출한 의미를 말로 하도록 할 필요가 없다.

둘째로 황장엽을 달래서 사상적으로 전향시키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평생 신념을 가지고 공산당 운동을 한 지식인인데 이제 그 나이에 전향하겠는가. 조용히 살아가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의 착각과 오류를 깨닫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황장엽이 쓴 글들을 20여년동안 분석해 보았지만 학문수련의 수준은 대학원 석사생 정도를 넘지 못한다. 조용히 더 공부할 기회를 주면 자기가 얼마나 무지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셋째로 황장엽을 통해 북한사정을 알려고 하지 마라. 황장엽은 직함은 높아도 실권이 없었고 주요정책 결정기구에서 일한 적이 없다. 이런 노인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어 내겠는가. 더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에 신경을 쓰다가는 우리가 북한사정을 잘못 알게 될 우려도 있다.

끝으로 황장엽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조처해 주어야 한다. 예부터 일흔이 넘은 노인은 죄를 묻지않고 사면해 주었다. 자기 발로 찾아온 북한노인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해 주는 우리의 동포애를 보여주는 것이 좋다. 혹시라도 괴롭힘을 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 당국에서 안전하게 지켜주고 옛 친구와 만나 회포도 풀게하고 마음이 동하면 스스로 참회록이라도 쓰게 배려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황장엽의 북한탈출은 북한에는 큰 충격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한 지친 북한 주민의 귀향」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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