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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어느 기념비’/‘이름’없는 영원한 진리(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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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어느 기념비’/‘이름’없는 영원한 진리(시평)

입력
1997.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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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은이라는 이름은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폭발적인 열정으로 40여년의 문학사를 관통해 왔으며, 한 사람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자기존재를 투신하는 치열함을 보여왔다. 그래서 고은의 시와 그의 정치적 활동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일은 이미 어려운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정치적 이상이 더 이상 문학의 이상이 되지 못하는 우리 시대에 고은의 시는 어떻게 읽혀져야 하는가? 최근에 출간된 그의 신작시집 「어느 기념비」는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그의 시를 읽는 새로운 독법을 요구한다.물론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역사적 당위의 과녁을 향해 온몸이 화살이 되어 날아가던 고은을 만나지는 못한다. 다소는 회고적인 시선이 시집 곳곳에 배어있다. 이를테면 「참여시」라는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적, 정치적 참여를 되돌아본다. 그는 그동안 <이 몸뚱이가 한개로 하염없는 즉흥 참여시를 노래하였습니다> . 그러나 이제 <텅 빈 광장은 언제 그곳이 그토록 거룩한 곳이었던가를 통 모르고 있습니다> . 하지만 시인은 회한의 정서 안에 결코 주저앉지 않는다. 그는 <참여란 어제까지도 오늘입니다 내일에 이르는> 라고 선언한다. <다시 벌떡 일어서서 응시> 하는 힘을 그는 아직 가지고 있다. 과거를 과거에 가두어두지 않고 미래를 향해 던지는 힘은 고은 시의 숨은 동력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그의 비문법적이고 예언적이며 남성적인 어법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집에서 받는 감동은 시인의 포기할 수 없는 참여의 열정이 아니라 <이름> 의 허무를 보는 담담한 지혜이다. 가령 「어느 기념비」라는 시에서 그는 <불멸이란 얼마나 슬플 것인가> 를 말하고 그 희미해진 이름 뒤에서 <그의 이름은 끝내 불멸이 아니어도 좋아라> 라고 노래한다. 이 기념비를 우리가 만약 이념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잊혀져가는 기념비를 보면서 시인은 이념이 없어도 운행하는 어떤 우주적 운동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이제 다시 <그것도 제 이름인 줄도 모르는 가을 물소리> 를 듣고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들국화> 를 보는 것이다. 시인은 어떤 이름 없이도 시로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시는 내일도 모레도 마침표가 없습니다> 라고 노래할 수 있다. <이광호 서울예전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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