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증 둘러싼 어느 부자의 명암/‘건축사’ 자격팔아 생계유지하는 아버지/아들은 유령회사서 자격증 도용/취직도 못하고 소송제기 불편까지92년말 H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한 건축회사에 입사 원서를 낸 K모(34)씨는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 둬야 입사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고는 깜짝 놀랐다.
K씨는 『회사라니 무슨소리냐』며 재확인을 요구했지만 똑같은 말을 들었다. K씨는 해당 관청을 쫓아 다닌 끝에 A사에 자신의 이름이 등록돼 있음을 알게 됐다. 토목기사가 필요했던 A사는 K씨가 취직해 있는 것처럼 서류를 위조한 뒤 자격증 복사본에 다른 직원 사진을 붙여 사용해 왔다. K씨는 이 회사를 상대로 자격증 도용에 대한 2,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300만원에 합의를 보고 취하했다. A사가 「어깨」를 동원해 합의를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회사였어요. 건축회사를 설립하려면 토목기사 등 각종 자격증 보유자를 반드시 고용해야 하는데 임금이 비싸니까 어디서 내 자격증 복사본을 구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K씨는 대학 4년때 토목기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제대후 대학원에 진학한 K씨는 선배 제의에 따라 자격증을 모회사에 빌려주고 일시불로 350만원을 받았다.
『아마 자격증을 빌려 주는 과정에서 A사가 자격증 복사본을 입수해 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회사는 제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격증도 빌려 쓰거나 도용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떡값 회사」의 전형입니다』
「떡값 회사」란 각종 공사 입찰과정에 참여한 뒤 응찰 포기를 조건으로 공사 수주회사로부터 「떡값」을 받아 챙기는 유령회사. 떡값 회사는 건축회사의 설립요건인 각종 건축 관련 자격증을 빌리거나 도용하는 수법으로 인가를 받아 입찰에 참여한다. 최근 이런 회사는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크고 작은 공사의 입찰과정에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K씨는 자격증 때문에 취직이 보류되고 소송까지 준비하는 등 곤욕을 치렀지만 고령의 아버지(76)는 지병으로 자격증 대여료로 생활하고 있다.
아버지는 20여년 동안 독자적으로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해 온 건축사로서 영업이 잘 안되자 문을 닫은 뒤 83년 다른 전주밑에 월급사장 자격으로 들어 갔다. 말이 사장이지 건축사 자격증만 대여해 주고 뒷전에서 도장만 찍을 뿐 공사 수주에서 도면 작성까지 실제 업무는 건축사 자격도 없는 전주가 직접 처리했다.
「도장 사장」으로 불리던 그는 92년 중풍으로 쓰러져 현재 투병중이다. 병석에 누운 뒤 출근도 하지 못한 채 도장과 자격증 등 일체를 사무소장에게 맡겼다. 감사가 나온다는 연락을 받을 때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회사로 나가 결재하는 시늉을 할 뿐이다. 그는 자격증 대여의 대가로 월 200만원씩을 받았다. 경기가 식으면서 요즘에는 「오다 말다」한다.
『건강때문에 다시 일을 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제 건축사 자격증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됐지요. 어차피 그냥 갖고만 있어야 하는 무용지물인데 그 사람들이 내 자격증으로 영업하면서 돈을 보내 주니 자격증을 굳이 되찾을 생각은 없습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임대자격증 사용자의 고백/임대자와 임차인은 ‘악어와 악어새’/대여료로 공사비 줄어/부실부를까 걱정되지만 관행이라 죄책감은 없어
『욕심이 나서 공사를 따 놓았는데 어떡합니까. 아는 사람을 통해 면허를 빌렸습니다. 불법인 줄은 알지만 건축업계의 뿌리 깊은 관행이라서 큰 죄책감은 없어요』
20여년간 대형 건설업체에서 근무하다가 92년 독립한 건축업자 N(55)씨는 업계의 부실한 문화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는 『현실을 무시한 탁상정책 때문에 불법 면허 임대자와 무자격 건축업자가 양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N씨는 독립적으로 200평 이상의 주택을 지을 수 없는 단종면허만을 갖고 있다. 빌라 단독주택 등 소형 건축물을 지어 온 그는 지난해 「큰 건」을 하나 잡았다. 연면적 380평의 4층짜리 건물을 평당 180여만원에 짓기로 계약한 것. 1억∼2억원 짜리 건물을 주로 지어 온 그로서는 7억8,000여만원은 큰 돈이었다.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공사라는 생각에 평당 2만5,000원을 주기로 하고 면허를 빌릴 수 밖에 없었어요. 공사에 들어가야 할 돈이 엉뚱한 데로 빠져 나가 부실공사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여료를 줘도 타산을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건축업계에 면허 임대가 고질적인 관행으로 자리잡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종합건설회사가 이익이 남지않는다는 이유로 거들떠 보지도 않는 소규모 건축물은 영세한 건축업자에게 맡겨지게 되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업자는 결국 면허를 빌릴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는 면허를 대여하는 건설회사와 그것을 임대하는 영세업자는 악어와 악어새같은 사이라고 설명했다.
『대여료는 총공사비의 4∼7% 또는 평당 일정액 기준으로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귀띔했다. 소규모 업자들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면허발급 기준을 대폭 완화하지 않는 한 면허 임대의 관행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건설현장에서의 자격증 대여 문제도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전문대 졸업 이상 학력자로서 건축기사 2급 이상의 자격증을 갖고 있어도 현장 실무에는 서툴기 때문에 건설회사는 기피하게 됩니다. 이들의 자격증 수첩만 빌려 행정기관에 제시하고 정작 공사현장에는 다른 사람을 씁니다』<김성호 기자>김성호>
◎자격증 불법대여 대학원이 ‘주무대’/공대·약대·부동산학과 학생들 월 30만∼100만원 받고 거래
대학원이 자격증 대여의 주무대가 되고 있다. 무자격자들은 대학원생으로부터 자격증을 빌려 건설, 부동산, 의약 등의 분야에 침투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대학원생 사이에 자격증 대여가 성행하는 이유는 서류상으로만 취업을 한 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퇴직처리를 하기 때문에 신분상의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데다 짭짤한 대여료 수입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격증을 빌려 간 회사가 감사를 받을 때면 무선호출기 등을 통해 즉각 연락을 받고 그때만 회사에 나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된다. 그나마 감사 자체도 대학원 석사과정 2년 동안에 1, 2번이 고작이다.
각종 자격증 소지자에 대한 정부자료가 전산화돼 있어 대학생이나 군인은 자격증 대여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학원생은 이런 점에서 조건이 완벽하다. 그런 이유로 무자격자들은 대학원을 자격증 대여의 표적으로 삼고 있고 대학원생도 「짭잘한 공돈」을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당국이나 학교는 자격증 대여의 고리를 끊기위해 단속을 강화하고는 있지만 자격증 대여 전문브로커 등과 선이 닿은 선·후배를 통해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정확한 실태파악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각종 자격 시험이 많은 공과계열 대학원은 자격증 대여 유혹이 가장 많이 들어 온다. 재학중에 관련 자격증을 1, 2개 정도 취득하는 건축 관련 학과가 브로커들의 주거래 대상이다. 건설회사를 설립하거나 운영하려면 건축기사, 토목기사, 환경기사, 설비기사 등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관련 학과 대학원생들의 자격증 대여가 빈번하다.
대학원생은 1년이나 6개월 단위로 자격증을 빌려주고 자격증 종류에 따라 월 30만∼100만원의 대여료를 챙긴다. 빌려가는 회사는 분야별 기술자가 골고루 필요한 건설업체가 대부분이지만 「떡값 회사」따위의 유령회사도 더러 있다.
K대 대학원생 C모(26)군은 『1, 2년 전만 해도 학과 사무실 게시판의 「OO기업, XX자격증 소지자 구함」과 같은 광고의 90%이상이 자격증 대여희망자 모집광고였다』며 『학교에서 대학원생의 자제를 당부하고 정부도 단속을 강화해 최근에는 거래가 한결 은밀해 졌다』고 밝혔다.
그밖에도 부동산학과 출신의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거래 대상이 된지 오래며 의사, 약사 등의 면허증 소지자도 브로커들의 유혹을 받고 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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