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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도덕 살아있나/양창수 서울대 교수·법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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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도덕 살아있나/양창수 서울대 교수·법학(한국논단)

입력
199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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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 돈 수수 연루 전·현직 의원 등 공인/공공연하게 거짓말/억지논리 정당화까지중국 명나라 말에 진백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잘 알려진 왕양명보다 44년 위로, 양명도 존중했던 철인인데 별로 저술에는 뜻이 없었다. 진백사가 말하기를 『사람이 칠척의 몸을 갖추었어도 마음이라고 하는 것, 도리라고 하는 것을 빼면 존중할 것이 없다. 기껏해 보아야 한 주머니의 피진물, 한 무더기의 뼈다귀 뿐이다. 배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추우면 옷지어 입고, 음욕을 행하고, 가난하고 천하면 부귀를 생각하고, 부귀하면 권세를 탐하고, 화가 나면 싸우고, 서운하면 슬퍼지고, 궁지에 몰리면 함부로 대들고, 즐거우면 푹 빠진다. 어느것 하나 혈기가 이끄는 대로 하지않음이 없이 지내다가 늙으면 죽는다. 그러니 이를 이름하여 짐승이라하여도 가할 것이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마음이라고 하는 것」 「도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있는지 새삼 물어보고 싶어진다. 세상일을 도덕의 잣대로 재어 말하는 것이 많은 경우에 위선에 불과하고 복잡하게 얽힌 사회의 문법을 획일적인 단순공식으로 억지로 재단하는 것이 되기 쉬움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도대체 우리사회에 기본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살아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이 너무나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거짓말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적인 지위에 있는 이가 공적인 사항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복해서 거짓말을 했고, 또 그것이 관련된 사람 중 예외적인 한두 사람이 아니라 거의 전부라고 하면 이는 문제가 다르다.

전현직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의 장 등 정치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한보로부터 돈을 받았는지에 대해 하나같이 부인하였다. 그런데 이제 검찰의 조사를 통해서 점차로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다. 아마도 이를 부인할 때에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리라고, 한보돈을 받은 사람이 많아 이를 파헤쳐서는 정치권 전체가 타격을 입을 것이니 감히 이를 파헤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니 입을 모아 일단 이를 부인하면 그대로 덮어두게 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 혹 선거철에 재벌로부터 선거자금 등을 받아쓰지 않고는 선거를 치를 수가 없으니 돈을 받은 것이 무슨 큰 잘못이랴하는 자기위안도 곁들여지지 않았을까.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이 나라의 정치가 돌아가는 「구조」의 핵심에 관련되는 사항이니 이를 밝혀 드러내는 것은 나라를 뒤엎을 생각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사회에서 항용 행하여지는 거짓말은 대체로 이와 유사한 억지논리를 갖추는 경우가 많다. 제도가 잘못돼 있는데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려면 혹은 살아남으려면 거짓말을 안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을 말기의 암환자에게 가족이나 의사가 사실을 숨기는 것과 같이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사 우리의 정치자금구조에 어떠한 결함이 있다고 해도 그 규정에 벗어나는 일을 저지른 것이 쉽사리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그 구조를 지어낸 사람이 그들이며 또 문제가 있다면 이를 고칠 권한이 있고, 고쳐야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하물며 일단 행하여진 일에 대하여 그러한 일이 아예 없었다고 잡아떼는 것은 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잘못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격의 모양새와 관련된다. 그들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를 국민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점이 아쉽다.

중국 청나라 때 김란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이 일생 살아가는데 불행한 것은 말을 잘못하였는데도 화를 입지 않는 것, 계획을 잘못 세웠는데도 요행히 일이 성사되는 것, 행동이 거친데도 작은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버릇이 되어 개의치 않게 되고, 결국 행실을 그르친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환난은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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