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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착륙 경착륙/류동희 국제부 차장(앞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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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착륙 경착륙/류동희 국제부 차장(앞과 뒤)

입력
1997.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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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 4월24일 중국 국민정부(국부)의 수도 난징(남경)이 공산군에 함락됐다. 그 때 막바지 순간에서야 철수한 외교사절은 소련대사였다. 같은 해 10월1일 마오쩌둥(모택동)은 베이징(북경)의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소련은 하루 뒤 가장 먼저 「공산중국」을 국가승인했다.중국 공산화과정에서 소련은 철두철미하게 이중적이었다. 입으로는 물론 「동지」 마오쩌둥을 지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동」 장제스(장개석)를 지원했다. 소련에게 모는 「양산박 수령」에 지나지 않았다. 코민테른이 공산주의를 제대로 교육시켜 파견한 왕밍(왕명), 푸고(박고) 등 「28인의 볼셰비키들」로부터 지도권을 빼았은 모가 자본론을 「이해」아니 「제대로 읽어나 보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것만이 「더블 플레이」의 이유는 아니었다. 소련의 세계전략상 「통일 중국」은 「바람직하지 않은」사태발전이라고 보았던 것. 소련이 대사를 막바지 순간까지 난징에 잔류시켰 던 것은 양쯔강(양자강)을 경계로 중국을 둘로 분할·공존시키는 구상에 미련을 가졌기때문이다. 소련이 우려했던 것은 「통일중국」의 유고화. 「통일한국」으로 「통일중국」을 견제하려는 소련의 구상때문에 한국전이 발발했다는 것은 소련장성 출신 러시아 역사학자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의 사료에 근거한 주장이다.

북한지원 문제를 놓고 최근 미국이 연착륙·경착륙 논쟁을 벌이는 듯한 양상이다. 북한을 다녀온 토니 홀 하원의원은 「식량지원에 미온적인」 한국과 관계를 끊고서라도 북한을 지원하자고 극언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을 방문했던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식량지원에 신중을 촉구했다. 이에앞서 지난달 27일 조지프 프뤼어 미 태평양사령관은 한반도의 장래와 관련, 「통일」보다는 「화해」가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화해」는 남북한이 독립된 국가로 있으면서 국경선에 평화가 이룩되는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북한에 대한 「두 목소리」와 「두개의 한국론」. 미국의 대한반도 외교전략은 48년전 실패한 소련의 대중국 외교의 패러디라고 보는 것은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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