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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라도 씻고 앉으란 말인가?/이순원 소설가(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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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라도 씻고 앉으란 말인가?/이순원 소설가(1000자 춘추)

입력
1997.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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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물어도 입을 꽉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을때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 같다는 말을 한다. 특히 누군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때 그런 잘못을 왜 저질렀느냐고 다그치면 말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벙어리」의 심정 속에는 이미 이쪽의 잘못을 그쪽에서 다 파악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무언의 시인과 차마 그 잘못을 자기 입으로 다시 말하지 못하는 염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일말의 염치도 없는 벙어리들을 우리는 저녁마다 텔레비전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한보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에 불려나온 증인들의 태도는 꿀먹은 벙어리 수준에조차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뻔한 일이어서 세살 먹은 아이들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전국민을 상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거나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 찾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고객이 예금한 돈을 맡아 그것을 착실하게 운용해야 할 금융기관의 책임자들이 그 돈이 잘못된 기업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 흘러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증언대에 섰으면서도 곧 죽어도 자신들이 법적으로 책임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청문회라는 것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거나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짚어내고 또 그 잘못의 진상을 듣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라 오로지 누가 그 의혹에 대해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만을 듣는 자리처럼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질문 역시 속 시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소속 정당 의원의 의혹이나 풀어주려고 애쓰고 어떻게 하면 상대를 같은 도매금으로 걸고 넘어갈 수 있을까 애쓰기 위해 그들은 모였고, 국민은 그것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는 형국이 아닌가. 정말 귀라도 씻고 앉으라는 얘긴가. 그들도 답답하지만 소득없이 바라보는 우리는 더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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