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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한국화 그 대담한 자기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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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한국화 그 대담한 자기변신

입력
1997.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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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같은 사진·서양화 같은 한국화/기술이 갖는 예술적 열등감?종이·수묵의 퀴퀴한 냄새?/고리타분한 편견·숙명을 벗고 다양한 표현방식·소재를 통해 ‘크로스 오버’를 주도한다퀴퀴한 냄새가 나는 한국화, 그저 찍기만 하면 나올 것 같은 사진. 유화에 비해 현대성이 처지는 것으로 여겨져 온 한국화, 그저 「사진기」로 만들어 내는 반기성품 취급을 받았던 사진.

그러나 이런 고리타분한 생각은 파괴되고 있다. 한국화와 사진이 다양한 소재와 표현방식을 통해 장르의 한계를 파괴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양화 작가들이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미술계 현상은 전반적 크로스 오버(장르 복합)의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 크로스 오버를 한국화와 사진이 주도하고 있다.

때로 그것은 양화에 대한 지나친 열등감에서 비롯된 무작정한 서양화 따라잡기로, 혹은 지나친 추상화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적 지평을 확장하기 위한 몸짓이라는 측면에서 신선하다.

미술에 대한 사진의 열등감은 사실 사진의 배냇짓과도 같은 것이다. 1837년 프랑스의 화가 다게르가 은판 사진을 발명한 이래, 사진은 현실을 재현하지만 그 사실성으로 인해 예술적 가치는 없는 것으로 인식됐다. 말이 달릴 때 다리가 땅에 닿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진이 발명됐다는 설까지 있는 것을 보면 기록 매체로서의 사진의 발명 동기는 이미 그 한계를 규정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우리 사진 작가들의 작품은 이런 예술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 혹은 뉴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미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새로운 버전 업으로 풀이될 수 있는 현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사진 작가들은 판화, 설치 등 타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사진의 확장을 꾀한다. 장르의 크로스 오버 현상이 가장 극심하게 나타나는 것도 사진 매체의 한계이자 가능성. 지난달 금호미술관서 열린 「사진의 확장전」, 22일까지 열리는 「모노크롬-사진과 영혼전」(갤러리 아트빔) 등은 그러한 시도의 대표적인 경우. 작은 사진들을 나뭇잎처럼 전시장 벽면에 조밀하게 붙이는 콜라주 형식의 시도도 있고 고명근, 이강우, 염은경 등의 작가는 마치 프랑스의 설치작가 볼탕스키의 경우처럼 사진을 주로 한 설치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볼탕스키가 사진을 소재로 이용했다면 사진 작가들의 설치는 사진에 무게 중심을 실고 있다.

「사진은 현실을 담는다」는 사진의 기본적 숙명을 거부한 사진 역시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작가가 현실을 재구성하고, 즉 허구의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을 추상적 방식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한지나 캔버스, 동판 등에 인화하는 방식을 넘어 컴퓨터를 이용해 영상을 재구성하는 디지털 솔루션 방법도 도입되고 있다. 지난달의 「더 컬러」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동판화 기법을 통해 사진에 금속성 질감을 불어넣은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달 아트스페이스서울서 국내 개인전을 가졌던 이정진씨는 한지에 감광유제를 발라 인화지로 사용하고 여기에 먹선이 두드러진 붓질을 함으로써 오직 한 장 만이 존재하는 사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들 사진 작품은 판화처럼 에디션(판수)을 기록해 팔리는 사진을 시도하는 등 상업적으로도, 미술의 영역으로도 깊이 침투하고 있다.

양화의 파상공세로 날로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한국화의 변신 노력 역시 최근들어 더욱 대담해지고 있다. 우선 재료 측면에서 전통의 종이와 수묵을 포기한 작가들은 이미 한국 화단의 굵은 맥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화의 스타 김병종(서울대 교수)씨, 이왈종씨 등이 대담 혹은 은은하면서도 토속적인 색감으로 미술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다면, 이들보다 연배가 낮은 작가들의 시도는 대담무쌍하다. 석철주(추계예술대 교수)씨의 경우 캔버스와 아크릴을 주로 사용한다. 물론 색한지나 색실 등 우리 전통 재료를 부분적인 오브제로 사용하고 있지만 재료만 보아서는 서양화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또 황창배씨, 사석원씨의 경우 민화 속의 전통적 세계관, 동양적 서정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정작 작품은 아크릴 등의 혼합재료를 이용해 뚜렷한 마티에르와 입체적 질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전통 소재인 닥지를 다양한 질감과 분위기로 확장하는 방식도 고답적 소재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한국화의 새로운 모색. 김천영씨는 만다라 부적 등 전통적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혼합재료와 닥종이를 이용해 독특한 질감을 모색하고 있다. 2월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한지―그 이후전」 역시 한지의 다양한 모색을 위한 전시였다. 닥지의 섬유질적인 성격을 통해 재료로서가 아닌 자체로서의 새 지평을 모색한 조덕호씨, 입체성을 강조한 박철씨 등 차세대 작가들 작품은 소재의 확장을 통한 새로운 영역으로의 틈입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루는 주제도 그 영역이 확장됐다. 나체사진의 콜라주 기법, 자연풍경과 어울린 남녀의 도발적 모습,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대담한 선추상 등 산수, 풍경 중심의 산수화를 거부하고 있다.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문인화 역시 강규호 구본호 등 젊은 작가들에 의해 부지런히 「업 그레이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작업에 대해서는 비판도 만만찮다. 『한국화의 살길은 무작정한 서양화 따라잡기가 아니다. 진정한 한국성 발견에 좀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신기술을 이용해 너무나 난해하게 되버린 사진, 그래서 보는 이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사진은 미술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감의 표현일 뿐』이라는 박한 평가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예술가에겐 바로 죄악이기 때문이다.<박은주 기자>

◎크로스 오버 이렇게 이해하자/전문화·분업화에 대한 반성과 저항/현대미술도 시대의 산물/사회를 직시하듯 감상하면 ‘난해의 장벽’ 넘을 수 있어

한국화, 사진의 새로운 시도는 미술대중에게 자칫 난해함으로 다가온다. 추상화 못지 같은 사진, 현대성이 가미된 한국화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대미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미술감상 인구가 빠른 속도로 늘면서 현대미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또한 크게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미술이라는 장르가 워낙 난해한 예술의 대명사로 인식돼 있어 감상자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다가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술 역시 사회현상의 하나로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변천과정과 특성에 기대 미술현상을 본다면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전문화 분업화 현상을 우선 꼽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 이성의 역할이 중시됐고 고도의 합리성을 추구하게 됐다. 이런 현상이 미술에도 영향을 끼쳐 파생된 양식의 최종적 형태가 추상화다. 사회 각 부문이 전문화되면서 각 영역의 특성이 무시되고 그로인해 대중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게 된 시대. 그 시대의 미술 역시 점, 선, 면, 색채, 구성 등 조형예술의 고유 요소를 극단적으로 발달시켜 스스로의 「자치구」를 만들었다. 과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던 이미지와 상징이 사라지고 「바벨탑의 언어」가 미술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전문화 분업화에 기반한 근대화가 낙원을 만들기는 커녕 세계대전과 환경파괴, 물신숭배, 민족 및 이데올로기 갈등 등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그런 까닭에 요즘 유럽인들이 20세기를 「자기 파괴의 시대」라고 일컫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미술분야에서도 그간의 전문화 흐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미술 고유 요소에 집착하는 대신 자연을 화폭으로 삼는 대지미술, 신체를 이용한 바디아트나 퍼포먼스, 생활속의 사물을 등장시킨 오브제 아트 혹은 설치미술, 과학기술을 동원한 비디오와 컴퓨터 아트, 회화와 사진 등이 서로를 넘나드는 탈장르 등 다양한 즉물적 형태의 미술이 나타나게 됐다. 이것이 70년대 이후 오늘까지의 중심 흐름이다.

거칠게 설명했지만 현대미술은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반발의 두가지 양상으로 크게 전개돼왔다. 양식적으로 요약하면 추상화와 탈장르다. 후자와 관련해 「이해하기 쉬운」 고전미술, 그러니까 「신분계급 시대의 미술」로 돌아갈 수는 없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치체계가 「왕정복고」될 수 없듯이 미술양식도 뒤돌아갈 수는 없다. 현대 사회를 직시하는 마음으로 현대미술을 대한다면 그 침묵과 절규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이주헌 미술평론가·아트스페이스서울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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