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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앞에서(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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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앞에서(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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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다. 목련화도 피고 개나리꽃도 피고 진달래꽃도 피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시국이 아무리 수상해도 꽃은 제철이 되니 어김없이 핀다. 꽃이나 보고 앉았을 만큼 한가하지 않는 세태속에서도 날 좀 보란 듯이 왁자하게 핀다. 아무리 딴눈 팔 겨를이 없는 시절이더라도 그럴수록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틀속의 꽃밭을 보듯」(서정주의 시 「학」)세상의 창틀 너머로 이 화사한 봄날의 꽃들을 보자. 세사에 지친 시선들은 꽃들이 다 지기전에 잠시 꽃잎에서 쉬자.대관절 꽃은 무엇하러 피는가. 세세화개지위수, 당시의 시구대로 해마다 피는 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꽃은 본래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는 인간은 꽃이 인간의 환경을 미화하기 위한 장식물로 착각한다. 그러나 꽃이 피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벌레들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면 인간은 실망할 것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벌레들을 유혹하여 벌레들로 하여금 꽃가루를 날라다 수정을 시키자고 나무들은 꽃을 피운다. 개화는 식물의 순전한 종족보존의 수단이다. 수정이 끝나면 꽃은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곧 시들어 버린다.

꽃이 가지각색의 빛깔로 피는 것은 사람들더러 다채롭게 꺾어다가 영광의 꽃다발을 화려하게 장식하도록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꽃의 색깔은 꽃가루를 매개하는 곤충의 종류에 달린 것이다. 꽃은 오랜 세월동안 나비, 꿀벌, 모기, 파리 등 중매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용색을 진화시켜 왔다.

꿀벌은 빨간색에 둔감하기 때문에 꿀벌이 꿀을 찾아오는 꽃에는 자주색이나 노란색의 꽃이 흔하고, 나비는 반대로 빨간색을 잘 식별해서 빨간 꽃이나 오렌지색 꽃으로 유인한다. 모기는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 피는 꽃에 모이니까 이 꽃들은 대개 밤에도 얼른 눈에 띄는 흰색이나 노란색이다.

꽃의 향기도 물론 사람의 코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충매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꽃은 모두가 향기롭기만 한 것이 아니어서 가령 파리가 달려드는 꽃들은 썩는 냄새같은 악취가 나는 것이 많다. 어차피 오물을 좋아하는 파리라 곱게 꾸밀 필요도 없어 꽃의 빛깔 또한 흑색이나 다색계통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꽃들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자손을 대대로 잇기 위해 지능이 발달된 곤충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꾀고 속인다. 사람들이 꽃을 완상하는 것은 꽃의 화장술을 경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꽃을 즐기면서 꽃의 종족 유지를 위해 무슨 힘을 보태고 있는가.

사람은 기껏 자연법칙을 자기 기호에 맞추어 깨뜨리기나 한다. 들판의 질서를 온실의 질서속에 가두어 야생화를 인공화로 만들어 놓고 좋아한다. 봄꽃은 추위 없이는 피지 않는다. 꽃나무도 일정기간동안 잠을 자야 한다. 휴면상태에 있던 꽃눈은 한겨울의 추위로 휴면물질이 줄어들면서 따뜻한 봄과 함께 발달하여 개화한다. 사람은 봄이 되기도 전에 꽃을 피우기 위해 꽃나무를 냉장의 저온으로 춘화처리한다. 꽃은 겨울을 잃어버린다. 또 야생식물을 원예화하자니 종자의 휴면성이 방해가 된다. 필요할 때 한꺼번에 꽃이 피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여러 대에 걸쳐 휴면성이 없는 종자를 골라 육종을 한 끝에 관상용 꽃은 잠잘 줄 모르는 것이 많다. 사람은 생명있는 꽃을 가지고 이런 악희나 한다.

사람은 꽃의 품종을 개량한다면서도 꿈의 꽃이라는 하늘색 장미 한송이의 육종에도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아무리 꽃을 모조해도 꽃의 향기를 꼭 그대로 인공적으로 재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꽃은 웃는다.

사람은 자연상태에서 꽃술의 꽃가루 하나 옮겨주지 않는다. 벌레도 새도, 하다못해 바람도 물도 꽃의 수정에 동원되어 다시 철이 되면 온 산야에 꽃이 만발하도록 돕고 있지만 사람의 손은 까딱 않고 꽃이 마치 자기를 위해 피었다는 듯이 구경이나 한다. 봄에 꽃이 피지 않으면 대지는 얼마나 쓸쓸하랴. 인간사회는 얼마나 삭막하랴. 이 황량한 세상에 눈길 둘 데가 어디랴.

인간은 꽃을 보고 있지만 꽃은 인간을 보고 있지 않다. 꽃은 인간을 외면한다. 꽃들에게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다. 화려한 꽃 앞에서 인간은 무색해진다. 꽃잎처럼 얼굴을 붉힐 뿐이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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