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나 바둑을 못하신다구요? 네, 몇 번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종내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남자분들 중에서 장기나 바둑, 둘 다 못하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혹시 방위전역 하셨나요? 웬걸요 하사였습니다. 대학때 교련과목을 펑크내는 바람에 33개월 꽉꽉 채우고 나왔습니다. 군대에서는 다들 장기나 바둑을 배우게 된다고 하던데요? 하기야 많이들 합니다. 잡기를 싫어하시나 보죠? 네, 그런 편이죠. 왜 싫어하시죠? 전 재미있던데. 시정의 지형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이 싫습니다. 우리 삶의 지형은 그 결과 골이 복잡하고 다층적일 뿐아니라 미묘하고 불확정적이기 때문에 운신이 일정하지도 않고 피아 구별도 선명하지 않은데 비해서, 바둑판이나 장기판의 모습은 너무 인위적으로 정돈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재미있으면 되잖아요. 어차피 오락인데요. 네, 어차피 오락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저는 오락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배경을 설명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제 생각에 의아해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저는 유희만을 위한 유희로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입니다. 무엇이든 사회적 일상성이나 삶과의 소통 가능성을 통해서 재미를 느낀다는 말입니다. 장기나 바둑판의 정연한 선들을 보고 있으면 숨통이 막히는 느낌이 듭니다. 장기판이나 바둑판에는 안팎을 통기시키는 장치가 없지 않습니까? 철저한 폐쇄회로의 공간 속에서 인위적으로 운용되는 기호들의 경합만 있을 뿐입니다. 「세상만사가 장기판 속에서 재현된다」느니,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느니, 하는 말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 논점은 재현가능성이나 축소가능성이 아니라, 재현과 축소의 방식에서 통기와 소통이 마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교육현실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교실 속의 앎이 교실 바깥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듯이, 도식화된 오락이나 취미가 삶의 질을 바꾸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취미생활 그 자체가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징표가 아닌가요? 전 그저 취미를 어쭤본 것 뿐인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은 없잖아요? 아, 네, 그렇게 들렸습니까? 다른 취미는 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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