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모두 비우는 식으로 철저히 조사를 받았다』92대선자금과 관련해서 검찰의 조사를 받았는지를 물은 데 대해 정태수 증인은 이런 답변을 했다. 청문회 내내 「모른다」 「아니다」 「말 않겠다」로 일관하던 답변 행태와는 다소 다른 태도다.
「연못 물을 다 퍼냈지만 드러낸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으냐. 대선자금 의혹은 근거가 없다」는 당당한 주장이 그 답변에는 담겨 있다.
실제로 7일의 청문회는 한보사건의 뿌리이자 「원죄」로 인식되어 온 대선자금 의혹에 대해서는 드러낸 것이 「아무 것도」없다. 검찰서도 조사를 했다는 사실이 정태수 증인의 입을 통해 선전됐을 뿐이다. 한보사태의 실체적 진실을 감싸고 있는 갑각만 더 단단해진 결과에 대해서, 그는 아마도 득의의 미소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지난 4년동안 신한국당에는 기업들로부터 1,100억원의 지정기탁금이 들어갔다. 92년 대선 때는 근 1조원이 들어갔다고 본다』
미국을 방문중인 김대중 국민회의총재가 5일 뉴욕의 교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다. 지정기탁금에 대해서는 지난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영수회담때 김대중 총재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신한국당에 1,100억원이 「기탁」되는 동안 야당에는 한푼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대통령이 나서서 똑같이 지원하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보도된 발언의 요지. 대화록을 보면 그 뒤에 전개된 말들이 흥미롭다.
『신한국당에 그만한 돈이 지정기탁금으로 들어갔는지 여부를 나는 알지 못한다』(김영삼 대통령)
『기업이 정부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이 문제다』(김종필 자민련 총재)
『내는 사람 마음대로이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냐』(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이 대표가 그렇게 말할 줄 정말 몰랐다. 세상을 어떻게 그리 모르느냐』(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잘못은 고치면 된다』(이 대표)
김 대통령은 『몰랐다』고 했고 이 대표는 『고치면 된다』고 했다. 기약은 없으나 개선의 여지는 있는 셈이므로 이 부분은 그래도 최소한의 희망을 가져서 좋을는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는 일」은 그러나 대선자금이다. 92년의 14대 대통령선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퍼부어졌던가, 그 돈의 출처는 어디였던가를 생각해 보자.
각 정당이 선관위에 신고한 선거운동 비용은 합쳐서 770억원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 10배가 넘는다는 게 정치권의 일치된 견해다. 한 경제학자의 추계로는 8,600억원인데, 이는 같은 해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선거비용으로 집계된 5억5,000만달러(4,800억원 상당)의 거의 갑절이라고 한다. 이렇게 쏟아붓고도 이 나라 경제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나라다. 이 돈의 출처 또한 「법외」와 「불법」사이이므로 특히 당선자는 헌금제공자의 「족쇄」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하다. 한보사건의 뿌리가 대선자금에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은 이래서 단순하지가 않다. 공조직에 뿌린 그 많은 자금에 더해서 그보다 더 많은 자금을 썼다는 유명한 사조직들의 운영이 오늘날 한보사태에 겹쳐 「김현철 의혹」을 낳은 원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요즘 새롭게 자주 듣는 말로 「원죄」다.
최근 「복제하고 싶은 역사의 지도자」로 까지 등장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그의 군사쿠데타와 그로부터 비롯된 악명높은 군사문화가 그가 성취한 어떤 업적으로도 상쇄되지 않는 「원죄」다. 그러한 그의 태생적 한계는 그 무엇으로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에게는 12·12군사쿠데타와 5·18광주가 「원죄」다. 그들은 지금 그 값을 치르는 중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후 누구보다도 열렬한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누구도 못했던 정치개혁들을 추진했으나 그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지금은 「복제하고 싶지 않은 지도자」로 까지 추락하고 있다. 이유가 많지만,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권창출과정의 의혹을 그대로 둔채 오늘까지 끌려온 점이다.
범을 잡기 위해 범의 굴로 들어간 3당합당은 이제는 미담이 아니라 「족쇄」이기 쉽다. 92년 대선자금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혹시라도 용서를 구할 일이 있으면 구하며, 해명할 일이 있으면 해명하고 국민 모두가 화해하는, 일련의 「대고백」 「대화해」가 필요하다. 이미 시작된 올해 대선이 또한번의 청문회를 마련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선거의 완전 공영제를 내용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의 더 큰 결단이 시급한 시점이다.<본사 심의실장>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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