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증기·기적소리와 함께 정겨운 “칙칙폭폭” 소리/머리맞댄 연인,김밥먹는 가족 그리고 깔깔대는 학생들/서울역을 떠난 기차는 신촌·장흥·송추를 지나 의정부로 향하고/봄향기에 취하고 추억에 취해 그 옛날로 되돌아간다하루 종일 증기기관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던 때가 있었다. 30년도 더 된 추억. 새벽같이 청량리역에 모여 출발하면 밤이 되어서야 경주에 도착했다. 지금 같으면 그 지루함에 지칠만한 기나긴 여정이 왜 그렇게 즐거웠던지. 창으로 솔솔 밀려오는 봄바람에 졸기도 했지만, 동굴이라도 지나치면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짓궂은 장난을 치며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곤 했다.
5일 상오 10시 서울역.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기관차가 플랫폼에 들어선다. 자리를 잡으려고 서둘러 올라타는 가족. 기관차 앞에서 바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연인들. 기적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화통을 타고 올라오자 기관차는 『칙칙폭폭』달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소리인가?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 살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그 네박자의 정서를 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중년의 부부,분명히 소시적 추억에 잠겨있으리라.
그러나 예전같지만은 않다. 국내 증기기관차는 64년에 모두 폐기처분해버려 94년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석탄 대신 기름을 사용하는 디젤엔진이라 시꺼먼 작업복의 승무원도 볼 수 없다. 객차는 창문을 열 수 없는 무궁화 객차 4량을 달고 있어 그 정취는 덜하다. 수입한 증기기관차가 힘이 약해 마지막 열차에는 또 하나의 디젤엔진이 달려 있다.
그러나 시꺼먼 기관차와 허연 증기, 달려가도 따라갈 듯한 여유있는 달림, 왁자지껄한 객차 풍경, 산과 들, 논과 밭. 분명 추억이다. 이렇게 증기기관차는 기름 대신 추억으로 굴러간다.
차창 너머로 불에 그슬린 논과 활짝 핀 개나리를 바라보며 행복에 겨운듯 머리를 맞댄 청춘남녀, 깔깔대며 게임을 즐기는 학생들, 벌써 김밥을 펼쳐 놓은 가족, 그리고 손을 꼭 잡고 창밖을 구경하는 70대 노부부의 모습. 기차여행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들.
열차는 신촌, 가좌를 거쳐 수색을 지나면서 완전히 도심을 벗어난다. 붉은 황토와 그위에 새싹을 틔우고 있는 수십만평의 비닐하우스촌, 먼산 군데군데 산불을 질러놓은듯한 진달래꽃무리.
기차는 능곡을 지나 일영역에 닿는다. 연인들의 한적한 데이트코스. 역에서 남쪽으로 500m만 가면 넓은 소나무숲과 파릇파릇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노고산에서 흘러내리는 강에는 호젓한 보트장이 있다. 인근에는 북한산의 인수봉 백운대 등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신흥유원지도 있다. 어느새 11시20분. 아이들은 김밥도시락을 펼치고 출출해진 할머니도 인절미를 꺼내 할아버지 앞에 내민다. 이즈음 열차는 장흥역에 도착한다. 장흥은 분위기다. 초입인 장흥역 앞에서부터 길 양편으로 향토색 짙은 토속음식점, 근사한 프랑스 레스토랑, 통나무집 카페 등이 100여 개 늘어서 있다.
장흥역에서 10여분 걸으면 야외 조각전시장인 「토탈미술관」. 맞은 편으로는 아담한 놀이공원인 두리훼미리타운이 있다. 여기서 3㎞ 정도 산책길을 걸어 올라가면 장흥의 대표적 레스토랑 「예뫼골」. 100여개가 넘는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어 차라리 자연미술관이다. 장흥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도 일품. 벽난로에 지펴진 장작불은 운치를 한껏 돋궈준다. 장흥은 주말이 아니더라도 항시 가족과 연인들을 부르고, 젊음과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장흥에서 대부분의 승객을 내려준 기차는 온릉을 지나 송추로 향한다. 송추는 젯상바위, 족두리바위, 왕바위 등 기암괴석과 계곡이 볼만한 유원지. 유원지 입구에서 시작되는 4㎞의 오솔길도 산책하기에 좋다. 드디어 기차는 종점인 의정부역에 도착했다. 11시50분. 서울역에서 출발한 지 1시간35분이 걸렸다.
교외선 증기열차는 서울역에서 상오 10시15분에 출발한다. 신촌―가좌―수색―능곡―대곡-일영―장흥―온릉―송추를 경유, 의정부에 종착하는 열차는 12∼3월을 제외하고는 휴일마다 운행된다. 어디서 타든 요금(편도)은 3,500원(어른), 1,800원(어린이)이며 예매는 1주일 전부터 한다. 좌석은 자유석이라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다. 주중에는 예식차량도 달아준다. 요금은 1량 왕복에 56만원. 열차는 의정부에서 하오 5시에 다시 서울로 출발한다. 기다리기 싫으면 전철을 타면 된다.<유병률 기자>유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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