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클 가입하라… 돈 내놔라/온갖 이유로 피멍들도록 맞고 학교 알렸다간 또다시 보복폭행/우리 자녀들 괴롭히는 ‘악몽’새학기를 맞을 때면 학부모들의 머리는 무거워 진다. 새로 만날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일지, 학년이 올라 가는데 늘어 나는 과외비는 어째야 하는지. 그러나 『우리 아이가 혹시 두들겨 맞고 돈 빼앗기고 마음 병드는 것 아니가』하는 걱정보다 더한 것은 없다.
매년 거듭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여전한 학교주변의 폭력과 피해학생들의 고통은 「청소년폭력 예방재단」에 걸려 온 상담전화를 「엿듣는」 것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귀가시간인 하오 5시 청소년폭력 예방재단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밀 보장 원칙을 지키기 위해 취재팀은 학생들의 양해를 얻어 통화 내용을 듣기만 했다. 상담하는 학생이 원하지 않을 경우는 접속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취재팀과의 접촉을 꺼렸다. 신문에 보도돼 가해학생들이 알게 되면 즉각 자신에게 보복이 돌아올 것이라고 불안해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간신히 통화에 응한 K(14)군은 학교 폭력서클 가입을 거절하는 바람에 집단폭행을 당했고 이를 학교에 알렸다는 이유로 보복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선배로 구성된 교내 폭력서클 회원 20여명에게 낮에는 학교 뒷산에서, 밤에는 교실에서 집단으로 폭행을 당했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 어머니가 알아챘고 이를 학교측에 알렸다.
폭력서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학교측은 주동학생 3명을 엄하게 처벌하고 서클해체 각서를 받았다. 그후 가해학생들은 『너 때문에 혼이 났다』며 『죽을 줄 알라』고 위협해 K군은 등교 자체를 겁내고 있다. 『자꾸 두들겨 맞는 꿈을 꾸게 돼 잘 수가 없어요. 또 먹으면 자꾸 토해요. 억지로라도 먹으려고 하면 맞던 생각이 나서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파요. 공부시간에도 칠판을 보면 맞던 모습이 떠 올라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엄마는 내가 그애들과 만나도 못본 체 하고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시퍼런 칼을 들이 대고 따라 오라는데 어떻게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요즘은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외삼촌 집에 있다가 엄마가 퇴근할 때 같이 집에 가요. 한번은 외삼촌이 그 애들을 혼내 줬는데도 소용이 없었어요』
K군은 심하게 떨면서 말을 해 알아 듣기 힘들 정도였으며 이야기 도중 이름은 물론 학교명이나 학년도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고모님이 사시는 대구로 전학갔으면 좋겠어요. 걔들로부터 벗어 나려면 무조건 먼곳으로 가야해요. 서클에 있는 형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어떤 아이가 괴롭힘을 당한 것을 학교에 알린 뒤 보복이 두려워 전학을 갔지만 형들이 새 학교에까지 찾아가서 마구 팼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보고 전학을 가도 소용없다고 겁을 줘 무서워 죽겠어요. 선생님께 또 말씀드리려 해도 오히려 더 큰 보복이 있을것 같아 걱정이에요. 전학이 안되면 어떡하죠? 고등학교에 다니는 교회 형들한테 걔들을 혼내 주라고 부탁하면 어떨까요?』
상담원은 『선생님과 어머니, 외삼촌, 교회 형들 등 너를 도와 줄 사람이 주위에 많으니 무조건 걱정만 하지 말고 일단 형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라』고 답변했다. K군은 1시간 가량 통화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처음에는 울먹이며 말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차분해 졌다.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한 데다 상담원의 답변이 어느정도 심리적 안정을 되찾게 해 준 것 같았다.
K군에 이어 통화가 이뤄진 L군(16·고1)은 비교적 담담하게 취재팀의 전화 취재에 협조했다. 『2주일정도 전의 일이에요. 교실 창가에서 쉬고 있는데 성적은 전교 꼴찌고 행실까지 불량한 애가 다가 오더니 얘기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피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너네 집이 부자니까 5만원만 달라」는 것이었어요. 싫다고 하니까 팔꿈치로 등을 내리 치더니 1주일 안에 안가져 오면 죽을 줄 알라고 협박했어요. 그뒤로는 온통 그 생각 때문에 공부가 안돼요. 갖다 주자니 계속 달라고 할 것 같고 안 주면 때릴 것 같아서요』
L군은 얘기를 해 나가면서 오히려 안정을 잃어 갔다. 말을 하다가 진정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고 중간 중간에 한숨을 길게 내쉬기도 했다.
『2만원 밖에 없다고 하면 봐 줄 것도 같아서 그 정도만 갖고 다녔는데 1주일이 지나니까 그 애가 다른 반 애들 2명과 함께 나를 화장실로 불러 돈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2만원만 건네 주었더니 배를 때리고 돈을 가져 가면서 「이건 오늘 안 내놓은 돈의 이자니까 1주일안에 꼭 가져오라」는 거예요. 갑자기 나도 모르게 그자리에서 울어 버렸어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선생님께 알린다 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 질 것 같아 망설이고 있어요』
상담원은 조용히 타일렀다. 『일단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세요. 문제가 발생하면 혼자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선생님이나 가까운 친구, 가족들에게 상의하면 좋은 해결책이 나올 겁니다』
2시간도 안돼 K, L군 외에도 6명이 비슷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 상담원의 충고대로 해 볼 자신이 없다는 학생도 있었고 상담원 말대로 해 봤더니 문제가 말끔히 해결돼 고맙다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상담전화를 걸어 왔고 상담원들은 이들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을 심어 주는데 중점을 두고 『너는 혼자가 아니고 항상 곁에 네 편이 있다』고 강조했다. 상담을 끝낸 학생들은 대부분 기분이 홀가분해 졌다고 고마워했다.
그러나 이 재단을 찾아 오거나 전화로 상담해 오는 피해 학생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피해 학생들은 아무 대책없이 끙끙 앓으며 시들어 가고 있을 것이란 상담원의 우울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염영남 기자>염영남>
◎경호원 고용 등하교… 어쩌다 이 지경에/부모,보다못해 궁여지책/당국·학교 도대체 뭘하는지…
서울 송파구 S중 2학년 홍모(14)군의 등하교길에는 20대 청년이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아침 8시 승용차로 홍군을 학교까지 바래다 주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홍군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1주일에 세번 홍군이 학원에 갈 때도 어김없이 따라 다닌다. 그는 사설경호업체 「한국경호경비시스템」 소속으로 학교주변 폭력배들로부터 홍군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 홍부기(39·회사원)씨는 3월초에야 아들이 1년 넘게 학교주변 폭력배들에게 시달려 온 사실을 알았다.
『학교에 다녀 온 애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도무지 말을 안해요. 그러더니 몇일후 갑자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합디다. 깜짝 놀라 종일 아이를 달래 자초지종을 알아 보았지요. 몇달째 하교길에 칼로 위협을 당해 돈을 빼앗겼다는 거예요. 매주 용돈 2만원을 꼬박꼬박 「상납」하고 시계, 신발까지 빼앗겼답니다. 그런데도 보복이 두려워 나한테도 말을 못했대요』
홍씨는 즉시 이 사실을 파출소에 신고했다. 그러나 파출소에서는 『그런 사건이 워낙 많다. 알았으니 기다려 보라』는 게 고작이었다. 학교측에 해결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교사들이 등하교때 단속활동을 펴고는 있었지만 역부족이라고 생각해 아예 알리지도 않았다.
다른 동네로 이사해 학교를 옮겨주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수십년간 현재의 집에서 살아 온 노부모를 생각해야 했다. 궁리끝에 사설경호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애가 더욱 심한 정신적·육체적 충격을 받기 전에 이렇게라도 손을 쓸 수 있게 돼 그나마 다행입니다. 경호원을 붙이고 나서는 애가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홍군은 요즘 자기방어 능력을 기르기 위해 태권도 학원에 다닌다. 홍씨는 아들이 유단자가 될 때까지 경호원을 계속 붙일 생각이다.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모르는 그때까지는 빠듯한 살림에 월 100만원의 경호비를 계속 지출할 수 밖에 없다.
『교육비 대기도 힘겨운데 이런 고통과 부담까지 떠안게 된 처지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지요. 이렇게 한다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요. 정부당국과 학교가 도대체 무얼하고 있는 건지 답답합니다』
「한국경호경비시스템」은 홍군 외에 송파구 B중 2학년 김모(14)군의 등하교경호도 맡고 있다. 백봉현(43) 사장은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중·고생 학부모들의 상담 및 문의 전화가 하루 평균 10통씩 걸려 온다』면서 『그러나 비싼 경비때문에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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