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외국프로그램 모방 우선/‘PD가 기획까지’ 관행화개편 때마다 일본, 미국의 인기프로그램을 「참고」하기 바쁜 우리 방송에서 「기획」은 붙잡기 어려운 이상에 불과하다. 기껏 기획이 있다면 「스타만들기」정도가 고작이다.
최근 MBC에서 일어난 해프닝 하나. 지난달 22일 「쇼! 토요특급」에서 탤런트 차인표가 치렁치렁한 긴 머리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새 미니시리즈 「별은 내 가슴에」에 기용된 차인표의 인기가 「의외」로 주춤하자 초조해진 MBC가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위해 차인표를 개그맨으로 둔갑시키는 「초강수」를 둔 것. 하지만 시청자의 반응은 차가웠다. 『차인표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90년대 이후 트렌디(경향)드라마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등장한 방송의 「스타만들기」는 결국 드라마의 저질화를 부추겼고 「5초짜리 CF스타」를 양산했다.
현재 방송국에서 기획 부분은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PD의 몫. 하지만 조금이라도 열정을 가지고 기획에 몰두하다 보면 당장 제작이 소홀해져 『빈둥거린다』는 욕을 먹기 일쑤다. 드라마의 경우도 「연출의 독과점」 상황이다.
연출자는 제작뿐 아니라 기획과 행정까지 챙겨야 한다. 또 그나마 가끔있는 기획도 상부로부터 「주문성」이 많다.
KBS 드라마제작국의 최상식 국장은 『우리 방송에는 아직 엄밀한 의미의 「기획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획과 제작을 분리하고 각 분야별로 전문가를 키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획의 시대」에 방송가는 여전히 주먹구구식 「감」에만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박천호 기자>박천호>
◎공연/음악기획사 본격경쟁속 연극계는 아직 겨울잠
무대화할 수 있는 문화 장르를 상품의 형태로 다듬어 일반에게 파는 작업, 「공연 기획」의 사전적 의미다.
언론의 독과점 사업이었던 클래식 공연기획사업이 일반의 귀에도 낯설지 않게 들린 것은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상업적 전문 기획사의 시대로 접어들자, 빅 이벤트를 두고 기획사들 간의 치열한 각축이 전개됐다. 업계는 95년 케니 G 내한 공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치열한 유치경쟁을 가장 대표적 사건으로 꼽고 있다. 한국은 외국 음악 스타들의 「봉」이다. 외국의 큰 손들은 그래서 한국 기획 업체들의 제살깎기 경쟁을 부추긴다느니 하는 뒤숭숭한 풍문도 뒤따랐다.
시행착오 끝에 우리의 음악 공연 기획사들은 최근들어 전공분야를 찾아 전문성을 띠어 가는 추세. 클래식의 「CMI」 「서울예술기획」, 재즈의 「파코스」, 가요의 「프로암」, 언더그라운드의 「플래너」 등. 96년 3월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된 「난장 커뮤니케이션즈」는 우리 공연 기획업의 새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사물놀이로 대표되는 국악을 중심으로 재즈 록 가요 등 인접 장르를 상품의 형태로 만들어 유통시키는 것. 「흥행성」과 「정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공연 기획 교과서가 말하는 바 「연계효과」로 잡겠다는 목표다.
연극판 상황은 대중음악에 비해 열악하다. 일단 전문 기획사의 활동이 미미하다. 「이다」 「에이콤」 「다운기획」 등 몇개 업체가 활동중이지만 극단에 소속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극 자체의 흥행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잘하면 본전, 십중팔구는 적자」인 형편에 적극적인 상품개발과 투자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연극판에서 기획이란 대개 제작·홍보 대행 정도의 부분적인 역할 분담에 그치고 있는 형편이다.<장병욱·황동일 기자>장병욱·황동일>
◎출판/베스트셀러 만들기 급급/내용보다 포장에 치중
요즘의 독자들은 책의 내용보다는 책이 가진 이미지를 소비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 그에 대한 독자들의 첫번째 선택기준은 책이 가진 상품으로서의 미학이다.
최근 한국출판연구소의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독자들이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첫번째가 부모 형제 친구의 추천, 두번째는 각종 추천도서 목록, 세번째는 책의 제목·표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책의 「포장」이 점점 출판기획에서 중요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과거 문학하면 「창비」 「문지」, 인문·사회과학 하면 「민음사」 「한길사」하던 식의 출판사에 따른 선택은 사실상 사라진 지 오래. 이제는 독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끌 수 있는 제목과 장정, 대대적 광고 등 적극적 마케팅 전략이 출판사들의 기획의 최우선점이 된다.
최근의 경우 「한권으로 읽는…」시리즈가 일으킨 돌풍이 단적인 예. 일본책의 냄새가 풍기는 「…100장면」류의 책들도 다이제스트에 길들여진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고, 「…무작정 따라하기」같은 제목은 신간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독자들의 발길을 잡는 효과적 도구다. 주요 출판사들도 독자가 한정될 수 밖에 없는 전문서·고급 교양서 등 이외에는 연간 몇종 씩의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전략적으로 골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요즘 출판계의 형편이다.
문제는 상품미학이 이렇게 출판기획의 제일 가는 기준이 될 경우, 출판문화 수준의 전반적 하향화가 우려된다는 점이다. 가볍고, 눈에 띄고, 튀는 것을 선호하는 요즘 문화대중의 기호에 한 사회의 문화수준의 척도가 되는 출판이 영합하고 있다는 우려다.<하종오 기자>하종오>
◎미술/‘관람객 끌기’ 참신한 기획전 잇달아
일반인에겐 문턱 높은 장르중의 하나인 미술. 그래서 일반 감상자들을 감싸안는 참신한 기획이 그 어느 장르보다 필요한 곳이다.
「갤러리 사비나」 「갤러리 보다」 「갤러리 시우터」 「서남미술전시관」 등은 화랑 경력이 별로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규모가 크지도 않은 화랑이다. 그러나 이들 작은 화랑들은 전시장을 찾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전시를 자주 마련한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정면에 내세운 「삶과 죽음」전, 소의 해를 맞아 기획한 「소」전 등은 갤러리 사비나의 기획. 「갤러리 보다」 「갤러리 시우터」 「서남미술전시관」 등은 실험성이 강한 전시들과 마이너 장르로 취급돼온 일러스트레이션, 만화, 의상전 등을 기획해 젊은 미술인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최근 큰 미술관이 기획한 전시중에선 성곡미술관의 「미술관에 넘치는 웃음」전에 관객이 많이 몰렸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미술관, 화랑의 문턱을 넘기가 아직은 부담스러운 것은 화랑을 서비스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업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는데다, 미술관 역시 무게있는 전시만이 권위를 보장한다는 낡은 개념의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기획의 발상전환은 미술인들이 주문처럼 외치는 「미술 대중화」의 첫걸음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영화/작품성 대신 이벤트만 요란 부작용
「이벤트만 요란하고 영화는 볼 것 없다」.
요즘 영화계는 이벤트에만 매달린다. 작품성, 예술성에 신경쓰기보다 별난 행사로 관객의 발길을 잡으려 한다. 외화, 한국영화 구분이 없다.
「섀도우 프로그램」 「러브 앤 워」 「용병이반」 「미스터 콘돔」처럼 상품공세를 펴는 것은 그나마 낡은 방식이다. 눈살찌푸리게 하는 행사가 끊이질 않는다. 「에비타」 패션쇼,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시네마 미팅, 「필링 미네소타」의 특별한 커플찾기, 「홀리데이 인 서울」의 예쁜다리모델 콘테스트, 「라 파르망」의 미스벨루치 선발대회….
영화가 초라할수록, 대기업이 만들거나 수입한 작품일수록 이같은 「관심끌기」가 심하다. 대신 한국영화는 제작과정에서 치밀한 조사나 연구, 외화는 정확한 작품분석은 뒷전이다. 문제는 각종 이벤트가 영화발전과 관객 저변확대에 기여하기 보다는 「적당히 만들거나, 아무 외화나 들여와 관객 속이기」풍조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서울 코아아트홀과 5일 개봉된 한국영화 「쁘아종」의 제작사인 씨네웍이 최근 서울지역 8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의미심장하다. 응답자의 53.2%가 「상품협찬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65%가 「영화관람여부가 상품협찬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결국 관객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얘기다.<이대현 기자>이대현>
◎가요/시장분석서 가수양성까지 체계화
가요계의 모든 스타들은 대부분 기획의 승리다. 특히 무명에서 하루아침에 스타로 발돋움하는 데뷔 과정은 기획이 필수적이다. 노래만 잘 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음악성이 뛰어나다고 반드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소비자들의 기호가 그만큼 빨리 변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서는 주류 음악과 최신 외국 음악경향은 물론이고 사회심리를 비롯, 음반시장을 둘러싼 제반요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국내에서의 랩과 10대 문화의 수용 가능성을 읽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표적사례. 최근의 예로는 복고풍이 물씬한 「존재의 이유」로 성인층에 크게 어필했던 김종환을 들 수 있다. 이밖에 지적인 노랫말을 내세웠던 대학생 그룹 O15B나 퓨전 재즈풍의 가요를 들고 나온 김현철, 언더 그라운드에서 솔로 데뷔 후 로커로 자리를 굳힌 김종서, 심지어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이소라까지도 결국은 시대의 흐름을 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모던 록 창법을 구사하는 주주 클럽도 마찬가지다.
변화의 속도가 한층 빨라진 90년대. 이제는 어떤 장르나 특정한 스타일의 음악 뿐 아니라 노래하는 가수까지도 기획하는 시대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양파의 경우도 노래를 잘한다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10대들의 자기 동일시가 인기의 주요인이다. H.O.T의 멤버 하나하나가 기획사의 철저한 의도대로 뽑힌 소년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라이브 무대를 달구고 있는 리아 역시 그가 가진 라이브성에 주목, 전반적인 라이브 붐과 연결시켜낸 기획의 몫이 크다.<김지영 기자>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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