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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가는 시민파워

입력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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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 운동’이 꽃핀다/유기농산물 통해 도시·농촌 연결/‘땅을 살리고 더불어 살자’ 생활공동체/86년 이후 회원 1만3,000명 성장사단법인 「한살림」은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를 공해없는 유기농산물로 연결해 죽어가는 땅을 살리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힘써온 시민운동단체다.

86년 설립후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빵이든 떡이든 사람과 자연이 조화해 빚은 먹을 거리가 소중하다는, 「밥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전파하는데 열중해왔다. 값싸고 몸에 좋은 농산물을 도농간의 직거래를 통해 팔고 산다는 차원을 벗어나 생태계를 교란하지 않는 먹을 거리를 함께 나누면서 생명본질을 이해하고 새로운 생활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생활공동체운동을 펼쳐왔다. 대량생산을 위한 화학농법이 결국에는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깨고 망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시민운동을 통해 벗어나자는 것이 한살림운동의 요체다.

한살림의 생활공동체 운동은 70, 80년대식 사회운동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당시 농민운동,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던 운동가들 사이에 정당한 분배와 이를 위한 정치적 민주화만 이루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논리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농민운동이 정치지향적 시위위주의 운동으로 변질하면서 결국 「농민은 없고 운동가만 남았던」현상을 극복하기위한 대안으로 현실에 발을 붙인 공동체운동이 거론됐던 것.

김지하 시인과 가톨릭농민회장을 지낸 박재일 회장, 사회운동가 장일순씨, 천주교 원주교구, 원주지역 재야인사 등이 한살림 운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연초가 되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모여 생산계획량, 생산방법, 가격 등을 정하고 생산계획량을 기준으로 생산·소비 계획서를 작성한다. 이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맺는 일종의 약속이다. 생산자는 「책임 생산」, 소비자는 「책임 소비」의 의무를 진다. 생산소비 계획서에는 수량 뿐만 아니라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여부, 사용할 경우 종류 횟수 사용량 등을 상세히 기록한다.

서초동에 살고있는 주부 유영주(40)씨는 발족 회원이다. 『시중에서 나오는 야채와는 근본적으로 맛이 달라요. 얼음을 먹고 눈을 맞은 봄 냉이가 온실에서 키운 것과 맛이 같을 수가 있나요. 회원이 된 후 시중에 나와있는 배에서 농약냄새가 난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어요. 가입 초기에는 짜증도 났어요. 벌레먹은 과일이 많은데도 값은 1.5배나 됐어요. 하지만 이것이 자연과 가족을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참아냈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죠. 회원이 늘어나고 유기농법이 발달하면서 가격도 싸졌어요. 「어린이 생명학교」도 자녀의 정서순화에 도움이 되죠. 아이들이 농촌에 가서 메뚜기를 잡고 고추를 따보고 나서는 일기내용이 훨씬 풍부해 졌어요』

10여년 동안 풍파도 많았다. 조직운영의 미숙, 조직의 성장을 따라 가지 못하는 인력양성 지연 등으로 시행착오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또 상근요원들이 낮은 급여문제로 파업을 하기도 했고 늘어 나는 물량을 충당하는 과정에서 경험없는 유기농가가 참여, 부적격 농산물을 납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의 목적이 건전했고 회원들이 잘 참아내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발족 당시 500명 정도였던 회원이 지금은 생산자인 농민 300여명을 포함, 1만3,000명으로 늘어났고 쌀 계란 참기름 등 8가지였던 취급품목도 280여종으로 늘어났다. 회원이 되려면 가입금 3,000원과 출자금 30,000원을 내면 되고 탈퇴하면 출자금은 즉시 돌려받는다. 출자금은 한살림 생산자들의 영농자금과 사무실·창고임대료 차량유지비 등 도농을 연결하는 기본비용으로 쓰인다.

최근에는 더 많은 소비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존의 공동체 구매 방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공급방식을 다양화하고 있다. 지역사정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려운 사람, 공동주문을 미처 못한 회원과 일반 소비자를 위해 서울 지역에 4곳의 판매소를 개설하고 틈틈이 하루장터를 열기도 한다. 이상국 한살림 전무이사는 『한살림의 이념은 단순히 농민을 살리자는 차원이 아니다』며 『우선 밥상을 살려 농업을 일으키고 최종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살려내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실명제 등 제도개혁서 환경·소비자 보호운동까지/정부가 할 수 없던 혹은 방치한 영역에서 민의를 대변하는 시민단체들/짧은 역사만큼 관료화·엘리트화 등 시행착오도 많지만/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의 ‘풀뿌리 운동’은 넓어지고 깊어간다

93년 8월12일 하오 6시. 정부는 획기적인 경제개혁정책인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한국 경제의 지축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낮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금융실명제에 관한 390쪽짜리 연구보고서를 출간했다. 경실련은 89년 출범 이후 국회와 정부관련부처 학자 일반시민 등을 상대로 금융실명제 도입 필요성을 환기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여 왔다. 그 결실이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날 정부의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계획이 발표돼 경실련은 환호성을 올렸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금융실명제는 시민단체의 잇따른 요구가 결과적으로 정부의 정책으로 구현된 것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융실명제가 시민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사정권 시절 반정부·민주화 구호를 무기로 삼은 운동가들이 대정부 투쟁을 통해 사회변혁을 시도했다면 문민정부하의 시민운동은 문제 제기는 물론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쪽으로 운동방향을 틀어 왔다.

시민단체의 운동은 금융실명제 외에도 크고 작은 많은 일을 이뤄냈다. 지난해말 정보공개법을 국회청원을 통해 제정했고 5·18특별법, 종합토지세 부과 등도 시민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환경단체는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 환경처가 환경부로 승격되는 결과를 가져 왔고 소비자단체는 국민이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당당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역사회에서도 시민단체의 활약은 눈부시다. 경주 시민들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들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경부고속철도의 경주 도심 통과안을 무산시켰다. 춘천에서는 쓰레기 소각장 설치를 둘러 싼 주민들과 지방정부간의 대립을 시민단체가 중재해 소각장 설립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단체에 따라 규모와 역량의 차이는 있지만 시민단체는 정부가 할 수 없거나 의도적으로 방치해 온 영역에 파고 들어 시민사회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세계적으로 점점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정부와 이윤추구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기업, 이해타산에 연연하는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앞으로도 갈등조정자로서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의 성과와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직 걸음마 단계인 우리의 시민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많다. 우선 시민운동이 몇몇 저명한 사회지도자나 언론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 외국에서 처럼 「풀뿌리 운동」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채 「시민없는 시민운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민운동은 시민의 힘과 자금이 활동의 원천이 돼야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회원 중심의 운동, 또는 소그룹 운동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는 장기적인 청산과제라 할 수 있다.

또 시민단체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상근자의 활동에만 의존, 관료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중요한 결정이 회원들이 배제된 채 상근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회원들은 회비나 내는 「바지 저고리」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다수 시민단체가 고유의 문제의식과 전문성을 결여한 채 무턱대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쟁점에 끌려 다니는 것도 문제다. 이런 경향이 심해지면 시민운동을 본질적 업무가 아닌 부수적 업무로 삼는 단체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경실련의 신철영 사무총장대행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시민운동은 비약적 발전을 해왔다. 그러나 여론을 주도하는 엘리트의 참여는 활발한 반면 일반 회원 참여는 부진한 것이 문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자원봉사 요원으로 활동하는 등 자발적인 참여가 시민운동의 밑거름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경제적·시간적 여유에 바탕한 시민 개개인의 「공적 관심」이 커져야 하고 「작은 희생으로 커다란 자아 실현의 기쁨을 맛보는」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 운동의 주체인 시민들이 『박수만 보낼 뿐 돈과 힘은 보태지 않는다』는 지적을 아프게 생각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시민운동이 싹틀 수 있는 것 아닐까.<조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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