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영수회담(지평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영수회담(지평선)

입력
1997.04.03 00:00
0 0

우리 정치사에서 여야 영수회담이 본격 등장한 것은 정당정치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제3공화국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주로 여야간에 현격한 견해차로 정국이 첨예한 대결상태가 될 때 이는 곧 꼬인 정국을 푸는 해결책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여야 영수회담이 끝난 뒤에는 으레 이 회담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질 않았음을 헌정사는 증언하고 있다.여야 영수회담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는 65년 7월, 「양박(박정희―박순천)회담」은 한일회담 비준과 국군의 월남파병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사태로 어수선한 가운데 열렸다. 야권은 정부의 한일수교협상 자세를 굴욕적인 매국행위라고 비난했다. 또 국군의 월남파병을 미국의 용병행위라고 시비 걸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중당의 박순천 대표최고위원과 담판을 시도했다. 5개항의 시국수습책에 합의하고 꼬인 정국을 푸는데는 성공했으나 야당은 강온대결의 집안싸움에 휘말렸다. 이유는 여성다운 섬세함이 결국 박최고위원을 나약한 야당대표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쿠라논쟁」에 휘말렸다.

「양박회담」후 영수회담은 한동안 열리지 못했다. 그러다 5년만인 70년 8월에야 다시 열렸다. 역시 박대통령과 상대는 「유연성」이 남달랐던 유진산 신민당수였다. 의제는 코앞에 닥친 주한미군철수를 비롯한 안보문제였다. 회담후 역시 야당은 강온대결의 양상을 노출했다. 박―유회담은 73년 6월 한차례 더 열렸으나 야당의 「사쿠라논쟁」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신이 기승을 부리던 75년 5월,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정치복원 담판을 위해 박대통령과 영수회담을 했다. 비주류측은 모종의 「묵계」가 있지 않나 의심했다. 『개인간의 약속은 무덤까지도 갖고가야 한다』는 김총재의 고집스런 신념 때문에 내용은 아직도 미공개상태다. 5, 6공 군사정부시절엔 영수회담이라는게 별 의미가 없었다. 군사통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야권이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로 양분돼 「대표성」문제도 걸림돌이 됐을 것이다. 만우절날 이뤄진 여야 영수회담을 보면서 이번만은 「잡음」 없이 성과가 있기를 빌어 본다.<논설위원실에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