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뛰놀던 산천이 곧 내 작품”『어머니 등에 업혀 팔 밑으로 고개를 빼고 아른거리는 봄볕을 바라보던 때, 춤꾼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덜레바리(말괄량이)처럼 뛰놀던 어릴적 우리 산천의 인상이 바로 내 작품들이니까요』
취봉 김백봉(70·경희대 명예교수)씨. 나라 잃은 서러움을 안고 도쿄(동경)의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찾아 현해탄을 건너던 열세살 소녀가 어느덧 고희를 맞았다. 그의 고희기념무대 「아! 김백봉」이 4월8일 국립극장 대극장(하오 7시·02―272―2153)에서 펼쳐진다. 김백봉춤보전회(회장 유학자 공주대 교수)가 마련하고 두 딸 안병주-병헌과 5대에 이르는 제자 200여명이 출연한다.
기념무대는 지난해 남편 안제승 경희대 교수가 작고하는 바람에 미뤄졌다. 김씨는 『공연에 쓸 음악을 찾느라 방을 뒤졌는데 남편이 테이프마다 깨알같이 적어놓았더라구요. 한평생 도와주더니 지금도 춤추는 내 옆에 남편이 붙어있는 게지 뭐야』라며 예술과 인생의 동반자였던 남편을 회고했다.
김씨는 이제는 신화로 남은 무용가 최승희씨의 제자이자 동서로 최씨가 월북한 후 무용계의 공백을 채운 한국무용사의 일부이다. 1941년 도쿄서 데뷔, 46년 창작을 시작했고 68년 첫선을 보인 화려한 부채춤군무는 대표적 민속무용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작 자유의 춤을 추고자 남으로 되돌아온 그 때를 김씨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기억한다. 『제자들은 해외로 공연을 나가는데 나는 여권도 못받았지요. 북한 관련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감시의 그림자들이 보였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시련이 성장의 계기가 됐습니다』
무대에 올리는 7편은 모두 군무로 김씨의 안무작 수백편중 분신과 다름없는 대표작들이다. 김씨와 두 딸이 함께 추는 춤은 궁중복식차림의 「화관무」와 72년 교통사고에서 재기하게 한 산조춤 「청명심수」다. 최승희씨가 처음 선보였던 보살춤 「만다라」도 스승을 기리는 의미에서 직접 선보인다. 또 「부채춤」 「무당춤」 「장고춤」 「선의 유동」 등이 공연된다. 김씨는 『한국의 부채춤은 낭창낭창한 부채의 흔들림이 백미』라고 말했다.<김희원 기자>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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