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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사회 ‘풀잎처럼 눕다’/‘흐트러진 기강’ 암행감찰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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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사회 ‘풀잎처럼 눕다’/‘흐트러진 기강’ 암행감찰 르포

입력
1997.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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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사회분위기속 동시다발 실시되는 감사 예봉/허점찾아 이리저리 뒤져도 가벼운 위반 몇건만이 실적/겉으론 충실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꼼짝않고 자리지키기/‘적발되면 중징계,몸사리자’ 형식주의·복지부동의 허상일뿐「풀잎처럼 누운 공무원들」. 요즘 일선 행정기관의 공무원들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속에 동시다발적으로 실시되는 중앙부처 감사의 예봉을 피하느라 연일 초긴장 상태다.

이때문에 겉으로는 대다수가 업무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급한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의 형식주의와 복지부동이 낳은 「허상」일 뿐 공직사회가 제자리를 잡았다고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취재팀은 3월말 지방행정부서에 대한 모부처 감사팀의 복무기강 암행감찰에 동행해 근무실태를 직접 확인했다. 업무시간에 정당한 사유없이 자리를 비우지는 않는지, 사무실에서 컴퓨터 오락 등으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는지, 출장자가 실제로 행선지에서 일을 보고 있는지, 숙직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이 중점 점검사항이었다.

3명으로 구성된 감사팀은 사업소 보건소 연구원 정수장 등 이른바 「취약기관」을 주로 찾아가 사무실을 은밀히 둘러본 뒤 문제점이 발견되면 신분증을 보이고 경위를 캐는 방식으로 하오 1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감찰활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신분노출을 막기 위해 꼭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했고 건물의 정문을 거치지 않고 후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 동향을 살피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한 사무실을 감사할 때는 감사팀이 덮쳤음을 다른 사무실에 알리지 못하도록 직원 출입과 전화사용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렇게 해서 적발한 업무태만 사례는 4건. 한 보건소의 예방의약계장은 소장의 출장허가 없이 관내 약사회의 자율지도원과 함께 약국의 한약유통과 판매실태를 점검한다며 상오에 사무실을 나섰으나 약사회에는 들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인근 중소도시의 보건소에서는 1명뿐인 숙직자가 초저녁부터 소주를 마시고 취한 채로 잠을 자다 들켰고 수도권 대도시의 공영개발사업소는 전직원이 하오 2시까지 사무실을 잠궈놓고 점심을 먹고 오다가 적발됐다.

공무원 복무규정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했지만 위반내용이 무거운 것들은 아니었다.

반면 도청의 출장소와 3곳의 시·군청을 포함한 나머지 기관에서는 이 정도의 태만사례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거의 전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출장자의 소재를 수소문하면 금새 연락이 닿았다. 숙직실 기사대기실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술판이나 고스톱판도 없었다. 감사팀은 취재팀을 의식한 듯 식사시간을 빼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무려 20여개 기관을 들락거렸으나 성과가 없자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관에게 『공무원들이 정말 성실히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때가 때인 만큼 몸을 사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감사원 내무부 총무처 등이 이미 대대적 감사를 예고했고 언론도 공직기강문제를 집중 거론하고 있는 마당이니 조심하고들 있다고 봐야지요. 이럴 때 감찰실적을 올리려면 한번 들렀던 기관을 바로 다음날 다시 가보면 됩니다』

도청 출장소의 한 간부도 『상오에 총리실 감사팀이 다녀가 이 지역의 전 관청에 소문이 쫙 퍼졌는데 적발이 쉽겠느냐』면서 『잘 해보라』는 냉소적 반응이었다. 그래서 『한 지역당 1, 2개 기관만 감사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게 암행감찰의 정석』이라는 게 감사관들의 귀띔이었다.

실제로 한 시립여성회관에서는 어디선가 미리 연락을 받은 듯 감사팀이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직원이 달려나와 신분을 묻고는 지체없이 상부에 전화보고를 했고 한 소방서에는 심야인데도 관계자가 문밖에 나와 접근하는 차량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다.

이같은 분위기속에 정상적인 업무가 가능할 리 없다. 군청의 한 직원은 『요즘에는 조사받는 것이 귀찮아 꼭 나가야 할 거리질서 단속이나 출장도 뒤로 미루고 자리만 지킨다』고 털어 놓았다. 또 환경사업소 관계자는 『오늘 시청간부가 순시를 나와 전직원을 집합시켜 놓고 「아무리 사소한 사항이라도 상부감사에서 적발되면 중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뒤 사람수를 세고 갔다』고 전했다.

공무원들의 두터운 「방어벽」에 부딪힌 감사관들의 푸념도 길었다. 『솔직히 이런 식의 감찰은 한계가 있지요. 사무실에 있다는 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감찰기간에는 오히려 「꼬투리만 잡히지 않으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합니다. 심지어 간부와 직원이 짜고 출장명령부를 허위로 작성하거나 출장지의 직원에게까지 미리 손을 써 놓고 엉뚱한 곳에서 노는 경우도 있어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반면 감찰을 당하는 공무원들의 항변도 적지 않았다. 시청의 한 직원은 최근 공무원을 향한 여론의 질타와 정부의 감사행태에 대한 불만을 여과없이 쏟아냈다. 『공무원이 무슨 범죄잡니까? 공직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같은 몰아치기 감사는 반발만 삽니다. 또 왜 자꾸 일선 공무원들만 쥐어짜는 겁니까? 장관이 수억원씩 뇌물을 받고 구속되는 판에 아랫사람들에게 기강을 강조해 봐야 먹혀 들겠어요?』<유성식 기자>

◎태만·눈치보기·줄대기 기승/지역구에만 몰두하는 장관서 상부지시거부 항명 직원까지 권력누수따라 온통 ‘뒤숭숭’

『요즘에는 몇사람만 모이면 「누구는 여당실세 모씨 사람인데 정권의 힘이 빠져 물먹게 됐다. 앞으로는 유력한 대선후보와 고교동문인 모씨가 잘 나갈 것 같다」며 수군댑니다. 상사들도 예전처럼 꼼꼼히 일을 챙기는 분위기도 아닌 것 같고…』

한 경제부처 사무관은 이렇게 전하면서 『위에서 복무기강을 하도 강조해 아직 별 탈은 없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뒤숭숭하고 느슨하다』고 실토했다.

한보사태와 김현철씨 국정개입 의혹에 따른 급속한 권력누수 현상, 장기화하고 있는 경제침체가 겹쳐 빚어진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 공직사회가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 일부 공무원의 업무태만과 눈치보기, 줄대기 등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더욱 불거지고 있다는 게 관가의 진단이다.

정치인 출신의 모장관은 부처 업무보다는 차기총선을 겨냥한 지역구 관리에 몰두해 빈축을 사고 있다. 어차피 올해말이나 내년초면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만큼 더이상 「윗분」 눈치를 보지 않고 「실속」을 챙기겠다는 것. 그는 틈만나면 지방순시 명목으로 고향에 얼굴을 내밀고 한달에 수백통의 부처 홍보물을 지역주민에게 보낸다. 그러다 보니 일부 직원은 아예 장관의 고향방문 수행과 홍보물 발송 등을 주업무로 하고 있다.

한보사태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통상산업부는 차기정권에서 정부조직 개편이 이뤄질 지 모른다는 소문으로 어수선하다. 『통상업무가 외무부로 이관될 것』 『미국처럼 무역대표부로 승격될 것』 『산업분야가 재경원 또는 타부처와 통합될 것』이라는 등의 말이 오가고 있고 직원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지방 일선세무서의 한 직원은 『우리같은 하위직 공무원들 사이에는 「이런 분위기에서 열심히 해봤자 생색이 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면서 『과세표준 결정 등 정밀조사가 필요한 부분도 그냥 넘어가고 체납분을 철저히 가려 내려는 의욕도 없어 세수 손실이 커지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직원들의 「항명」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부산시는 5월의 동아시아 경기대회에 대비해 지난달 9일부터 일요일과 공휴일에 전직원이 절반씩 교대로 비상근무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직원들이 집단반발 움직임을 보이는 바람에 근무시간을 당초 8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였다.

중앙부처의 경우 정기인사가 끝나는 이달 이후에는 이런 「업무누수」가 한층 확산,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정치인 출신의 또 다른 장관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간부들에게 『나는 다음 정권에서도 다시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엄포를 놓고 있다.

정권말기에 어김없이 나타났던 대권후보에 대한 고위 공무원의 줄대기는 여권의 대선구도가 불투명한 상태여서 아직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시장이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았을 것이란 의혹을 사고 있는 모광역자치단체의 경우 일부 중·상위직 공무원들이 벌써부터 차기시장후보로 거명되는 정치권 인사에게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얼마전 여당의 당직개편 이후 중앙부처의 명문 K고 출신들이 결속을 다지는 모임을 갖는 등 부지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있다.<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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