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직없이 파견근무·해외연수 소위 ‘인공위성’도 1,000여명/위험·골치아픈 문제 꺼리고 업무 뒷전 자격시험 준비도조직의 비대화와 인원과잉, 허술한 인력관리 등 정부의 방만한 조직운영에 따른 비효율이 더욱 심해졌다. 부처 이기주의와 책임회피, 잦은 정책변화, 비창의적 조직문화 등 고질적인 병폐도 시정될 기미가 없다.
정부조직의 비대화는 심각한 상태다. 공무원 수는 93년 87만2,543명에서 94년 88만2,548명, 95년 90만7,603명, 96년 91만3,952명, 97년 93만1,615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94년 부처통합으로 일시 줄어 들었던 정부부처도 최근 해양수산부와 중소기업청의 신설로 다시 증가추세로 돌아섰다. 현정권의 「작은 정부」 슬로건은 퇴색한 지 이미 오래이다.
인력관리도 허술하다. 보직없이 파견근무나 해외연수중인 소위 「인공위성」 공무원이 93년 677명에서 올해는 1,023명으로 크게 늘었다. 일없이 봉급만 받는 공무원이 부처마다 40∼140명은 된다는 얘기이다. 재경원의 경우 95년말 「인공위성」 국장이 47명으로 본부국장 25명의 2배 가까웠다. 통산부도 「인공위성」 국·과장이 60여명이나 돼 인력구조의 불균형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농림부, 해양수산부, 농·수·축협 등 농림수산 관련기관의 직원도 10년전에 비해 68%, 5만2,000명이 늘었다. 같은 기간 농민수가 41% 줄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형국이다. 교육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농촌지역의 학생수 감소로 많은 초등학교가 폐교위기에 몰려 있으나 교장 교감 자리는 대부분 그대로다. 군소 시·군 교육청도 통폐합될 기미가 없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김광웅 교수는 『공무원 5명중 3명은 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며 『이런 현상은 산하기관 공기업 정부투자기관 등 방계조직으로 갈수록 더욱 심하다』고 지적했다. 농림부의 한 관계자도 『지역사업소나 산하단체 자료를 받으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 부정확한 엉터리자료가 올라오기 일쑤』라며 『문체부 산하단체의 한 직원은 퇴직금을 16억원이나 받아나가는 등 조직과 예산운영의 방만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정부조직의 비효율성은 엉성한 업무관리에서도 드러난다. 재경원의 한 관계자는 『일부 3급과장이나 무보직 서기관들은 「내가 이일을 하고 있을 직급이냐」는 태도로 일보다 인사이동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며 『하위직도 마땅한 업무가 주어지지 않아 복사와 타이핑 문서수발 외에는 하는 일 없이 노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일선부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경기 일선 관공서 J과장은 『승급시험이나 세무사 등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직원들이 많다』며 『늘 업무는 뒷전이어서 조직운영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책임 미루기와 부처 이기주의도 여전하다. 위험이 따르거나 골치아픈 문제는 맡기를 꺼리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다. 부처간의 「밥그릇 싸움」으로 인한 정책혼선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잦은 장관교체에 따른 정책의 일관성 부족도 고질적인 병폐다. 통산부 K사무관은 『일만 터지면 장관이 바뀌고 일과성 해결책을 내기에 급급해 정책의 일관성 유지가 어렵다』며 『기존 정책들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 나거나 폐기처분된다』고 말했다.
업무방식도 상사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상명하달식이어서 개인의 창의성을 살리지 못하고 활력이 없다. 재경원의 C사무관은 『판단·결정 과정에서 담당자의 견해는 반영될 여지가 없어 위에서 지시하는 대로 할 뿐』이라며 『개인의 창의성과 능력을 살린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라고 지적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흐트러진 공직 대책은/처우 개선·경쟁원리 도입 시급/월급 적정인상·인사적체 해소/고위직 공채로 책임행정 구현
신한국당 대선 예비후보 가운데 한명이 최근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말을 인용, 『직업 공무원은 혼이 없다』며 공무원들을 정면비판한 일이 있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여전하다는 지적에는 국민들도 동의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소신껏 일하지 않고 상사의 비위를 살피는 공무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1.8%가 『어느 정도 있다』고 대답했다. 『매우 많다』가 18.9%였고 『별로 없다』와 『전혀 없다』는 각각 17.6%와 1.4%에 불과했다. 이 조사에서 공무원들은 창의성, 대국민 서비스, 적극적 일처리 등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은 『사회전체에 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일부 공무원의 문제만으로 공직사회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 인사적체와 열악한 대우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 공무원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 공무원 조직의 「허리」이자 실무자인 4, 5급 공무원의 급여는 대기업체 직원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행정고시를 거쳐 임용된 후 10년 정도가 지난 4급 1호봉 공무원의 기본급은 월 74만5,000원. 일반상여금 500%와 후생비 명목의 상여금 200%, 각종 수당을 합쳐도 비슷한 연배인 대기업체 과장 월급의 70∼80% 수준이다. 「명예」라는 보상조차 없는 하급 공무원의 박탈감은 더욱 심할 수 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경쟁원리가 실종된 권력지향적 수직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한 「사명감을 가진 공무원에 의한 책임행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 실적평가 제도와 책임경영 체제의 도입을 대안으로 거론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정부 혁신」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고위관리직을 공개채용하는 등 공무원 채용방법을 다양화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도의 경영능력을 필요로 하는 직책에 외부 인력을 과감하게 채용한 뒤 실적을 엄격하게 감독하고 평가하자는 제안이다.
KDI의 이계식 박사는 『독점체제로 인한 경쟁부재가 우리 공무원 조직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며 『법무나 감사업무 등 민간과의 경쟁이 가능한 분야에서부터 문호를 개방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오석홍 교수도 『일을 잘하기보다는 줄을 잘서야 출세한다는 생각이 공직사회에 팽배해 있다』면서 『처우개선과 함께 장기적으로는 강력하고 합리적인 평가·상벌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상연 기자>이상연>
◎어느 공무원의 항변/“일부 비리로 매도는 잘못/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매일 밤 10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고 때로는 새벽까지 일 할 때도 있어요. 하루종일 보고서 작성하고 상사 눈치보다 보면 거의 파김치가 돼 퇴근하지요. 복지부동이나 무사안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얘깁니다』
경제부처에서 일하는 C(30) 사무관은 공무원이 무사안일의 표본처럼 여겨지는 것이 억울하기만 하다. 한보사태와 경제위기에 이어 장관까지 바뀌면서 끊임없이 내려 오는 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장관보고용 기획안을 작성하라는 지시가 오후에 갑자기 떨어지는 날은 밤을 꼬박 새워야 한다.
C사무관은 94년말 정부 부처통합에 따라 현재의 부서로 옮겨 왔다. 처음 1년 간은 새로 일을 배우며 나름대로 재미와 보람도 느꼈지만 시간이 갈수록 회의가 들었다. 열심히 일해도 공무원에 대한 일반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격려나 칭찬 한마디 없고 업적은 상사가 다 가져가는 게 공무원 사회의 생리입니다. 조직운영도 상명하달식이니 개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기회도 없어요. 실수하면 호되게 욕만 먹으니 누가 책임지고 일을 추진하려 하겠습니까』
C사무관의 한달 봉급은 80여만원. 여기에 상여금과 체력단련비 등 후생복지비를 합쳐도 결코 풍족한 돈은 아니다. 가족을 부양하려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집장만은 꿈도 못꾼다. 『그나마 5급이상 공무원은 나은 편이에요. 9급 말단 공무원의 초봉은 본봉기준 월 37만원에 불과해요. 요즘 기본급이 40만원도 안되는 직장이 어디 있겠어요? 부모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고 결혼해 자식이라도 낳으면 최저생활도 어려워요. 말단공무원은 결혼할 자격도 없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어요』
그는 무슨 일만 터지면 정부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공무원만 성토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일부 고위층 인사의 비리를 이유로 전체 공무원을 매도하는 건 잘못입니다. 대다수 공무원은 제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또 처우 개선은 외면한 채 책임과 의무만 강조하는 건 오히려 부정을 조장하는 것 아닌가요?』
그는 요즘 자신이 퇴보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을 자주 느낀다. 자기계발은 커녕 취미생활을 할 여유도 없다. 정부에서 실시하는 교육은 공직윤리, 업무지침 등에 국한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외연수를 가 몇년간 여유를 갖고 공부에 매달리고 싶다』는게 그의 바람이다.<배성규 기자>배성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