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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정체(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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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정체(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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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시국을 난국이라고도 하고 위기라고도 한다. 온 나라가 위기감에 잠겨 있다. 국민들이 그런 불안심리에 젖어 있을 뿐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위기라고 떠든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말 위기인가. 위기라면 무엇이 위기인가. 그 정체를 정시할 때다. 혼미한 세상에서는 명료한 시국관이 필요하다.한보사태나 김현철씨 문제나 그 의혹 자체가 위기의 본체인 것은 아니다. 의혹들의 실체가 모조리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새삼스럽게 나라가 결딴날 일은 없다. 모두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요 결딴날 것은 다 난 일들이다. 진상이 밝혀짐으로써 그 처벌과 책임을 둘러싸고 정치적인 파문은 당연히 일겠지만, 그 파문이 나라를 침몰시킬만큼 큰 해일은 아닐 것이다.

또 진상 규명 자체가 위기일 수도 물론 없다. 의혹에 칼을 대는 해부가 자칫하면 나라가 위태로울만큼 위험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라의 생명을 건 수술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환부를 그대로 둘 때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배를 갈라야 한다. 수술을 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철저한 조사는 나라를 청소하고 소독하자는 것이다. 어찌 청소하고 소독하는 것이 위기이겠는가. 빈사의 위기가 아니라 재생의 호기다. 절망의 때가 아니라 희망의 때다. 그렇다면 무슨 위험들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고 혼동하고 있다. 오늘의 정국은 나라의 위기가 아니라 정권의 위기다. 의혹들이 진실로 드러나면 그것은 정권이 책임질 일이다. 정권이 위태로울 수 있다.

정권의 위기일 수 있는 까닭은 이 사건들 자체보다도 이 사건들이 현정권의 실정의 퇴적이기 때문이다. 부정부패의 척결 등 개혁의 실패와 인사의 난맥 등 국정의 문란이 이들 사건으로 표출된 것이다.

정권의 안정이 국가의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권의 위기가 바로 국가의 위기는 아니다. 정권은 언젠가는 바뀌게 되어 있고 나라는 면면하다. 정권의 요동이 나라의 갑판을 흔들 수는 있어도 침몰시키지는 못한다.

지금 우리 나라는 한 정권의 흔들림에 덩달아 곤두박질할만큼 경박한 나라가 아니다. 한 정권이 농단하지 못할만큼 나라는 든든해져 있다. 파도가 뱃전을 친다고 한쪽으로만 우르르 쏠려 배를 기우뚱거리게 할 정도로 중심잡을 줄 모르는 국민이 아니라면, 정권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정권의 운명이 곧 국가의 운명이라는 도그마를 역대 정권들은 유포시켜 왔다. 「짐이 곧 국가」이던 시대이래 그것은 모든 전제정치의 교리였다. 이 교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날에도 정권이 자신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인양 확성하여 자기보호에 역이용하기 쉽다. 지금 정부가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것도 그런 조짐이 아닌가 염려된다. 만약 정권이 정말로 자신의 위기를 전가하고 악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적 위기를 불러들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공연히 위기감에 함몰되어 있을 일이 아니요 그 때문에 민심이 표류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는 경제난이다. 이것이 위기의 실체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경제난은 자칫하면 국난이 될 수 있다. 정치적 의혹들이 다 풀린다고 해서 체증 내려가듯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정치난에 경제난이 가려져서는 안된다. 경제살리기에 국민적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권의 위기를 경제의 위기로 덮어버리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경제난 자체도 정부의 큰 실정의 하나다. 정권의 위기의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이 위기인 것은 국민의 의기가 소침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국가적 사기다. 정치적 난국이나 경제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힘을 내야한다. 그러자면 어서 위기의식에서 탈출해야 하고, 또 그러자면 의혹사건들의 진상과 함께 위기의 진상을 알아야 한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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