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60년대 지성인의 초상/파리 소르본느대 유학시절 ‘사상계’에 기고한 30여편 묶어/옛스런 어투나 문투는 물론 ‘가난’이란 말도 이젠 낯설지만/유럽의 지적토대 편력하는 그 치열한 탐구정신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생생히 와닿아「한국의 여권과 한국 국적을 갖고서 프랑스에 유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실상 6·25전쟁 후 53년에 한두 명이 있었고, 그 몇 년 후에 두서너 명이 있었는데 현재는 대략 200여명이 체류 중이다… 대학의 1년 수업료가 인문계는 10여달러에 불과한 무료에 가깝지만 이럭저럭 한 달에 최소 150달러는 가져야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액수는 한국의 대학교수 월급의 3배에 가까운 것이다」
어느때 이야기인가. 65년 한 가난한 유학생이 국내에 낸 「프랑스의 한국인」에 대한 보고서다. 박이문(67) 포항공대 교양·철학 담당교수가 60년대 「사상계」에 기고했던 글들을 찾아 모은 「다시 찾은 빠리수첩」을 펴 냈다(당대간).
한국전쟁 당시 창간돼 60년대말 폐간될 때까지 대표적인 지성적 잡지였던 「사상계」. 박교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소르본느 대학에 유학하면서 이 잡지의 주불 특파원으로 원고를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단 한 푼의 원고료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책에 실린 글들은 60년 5월호에 기고한 「한국이 본 영웅-끌로드 바레스의 죽음」에서부터 67년 1월호의 「이국에서 쓴 수필」까지 30여편. 박교수 자신은 까맣게 잊고 지냈으나 제자가 「사상계」 영인본을 뒤져 묶었다. 모두 30년도 더 이전에 씌어진 글들이다. 약간의 수정은 가했다지만 어투와 문투에서 60년대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국의 가난」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당장 눈에 띈다.
그러나 그 정서와 문제의식만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와 닿는다. 지금도 우리가 앓고 있는 지적·사상적 문제에 대한 저자의 문학적, 철학적 탐구가 그만큼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글들은 「가난했던 60년대 한 지성인의 초상」으로 읽힌다.
박교수는 파리를 떠나면서 쓴 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파산에 가까웠던 내 젊음, 누차 자살로 모든 것을 기권, 청산하려 했던 위기를 겨우 극복하는 데만 낭비했던 내 청춘,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젊은 시절을 지난 나는 지금 외진 빠리 한복판에서 한낱 늙은 열등생으로 머물러 있다. 나는 슬픔에 잠겨 있는가? 이곳 젊은이들이 이젠 별로 부럽지도 않다. 이들의 애인, 자동차, 아파트, 월급을 선망하지도 않는다. 아니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들이나 나나 인간으로서 살 자유가 있다…』 하지만 글들에서는 이런 간난을 이겨내는 정열, 당대 첨단에 있던 유럽의 지적 토대를 편력하는 그의 자유로운 인문적 정신의 궤적이 훨신 선 굵게 나타난다.
1부 「지식인과 사회」에서 그는 발레리, 사르트르, 카뮈 등 전후 프랑스 지식인들의 고뇌와 잡지 「렉스프레스」에 관한 이야기로 한 사회 속에서의 지식인의 역할을 탐구한다. 「문학사조」에 관한 2부에서는 당시 맹렬한 기세를 보이던 앙띠로망과 구조주의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3부 「프랑스 작가들과의 만남」은 인터뷰들이다. 잘 알려진 앙드레 모로아, 앙띠로망의 기수 로브 그리예와 시인 피에르 엠마뉴엘 등을 찾아 만난 그는 생생한 문체로 이들의 세계관과 문학관, 개인적 면모를 알려준다. 4부 「기행」은 스페인 모로코 이탈리아 기행문을 묶은 것. 5부 「빠리여, 안녕」은 파리 유학생활을 거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쓴 에세이들이다. 60년대 유학생의 에뜨랑제(이방인) 의식, 고국에 대한 향수와 애정이 짙게 드러나 있는 글들.
박교수는 소르본느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이화여대 불문과, 미국 시몬스대학 철학과 교수를 거쳐 91년부터 포항공대에 재직하고 있다. 「문학 속의 철학」 등 30여권의 저서와 「공백의 울림」 등 4권의 시집도 냈다.
그는 『나와 같은 세대들은 「사상계」 시절의 세상과 그런 세계에서의 고통과 낭만을 다시 새겨볼 수 있을 것이며, 젊은 세대들은 시간적으로 멀지 않지만 우리 역사가 그동안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드문드문 읽어냄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출간 의도를 밝혔다. 또 한가지, 『흩어진 옛 글들을 한 권으로 모으겠다는 생각은 삶을 정리할, 필요한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이 고희를 앞둔 노철학자의 말이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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