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강요한 신비·비과학을 벗고 오리엔트 재발견 열풍이 분다/아시아권 대중문화들은 영화·음반의 새로운 대안이 되고 서점가엔 동양서적 바람/서양 거울이 아닌 자기거울로 제자신 비추기가 시작됐다/하지만 이 현상이 소비적 유행이나 고고학적 흥미는 아닌지…신비하다. 하지만 비과학적이고 촌스럽다. 그래서 서양문화에 비해 한단계 열등하다. 적어도 「근대화」 「현대화」 「과학주의」의 관점에서 비춰볼 때 동양문화는 이렇게 간주돼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왕가위의 영화, 여명의 음반, 스타TV의 패션같은 대중문화의 영역은 물론이고, 중국의 역사서와 이슬람교의 코란이 진지한 문화연구, 문화담론의 영역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한국인의 아시아 다시 보기. 이 명제는 뚜렷한 주제없는 우리 문화연구의 틀 속에서 당분간 유효한 화두가 될 전망이다.
사실 우리, 즉 한국인이 아시아를 보는 눈은 서양인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초원과 징기스칸의 나라 몽골」, 「영겁의 시간이 숨쉬는 나라 인도」, 「600여년전 이방인들은 향료를 구하러 왔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역사를 발견하러 옵니다, 말레이시아」 아시아 각국이 세계에 선전하고 있는 관광 홍보용 문구들. 한결같이 자연과 신비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그곳을 여행해 인도인들도 PC를 사용하고, 몽골에서 핸드폰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해도 오랜 기간 익숙해진 이같은 동양의 이미지를 쉽사리 떨쳐 버리지 못해왔다.
철학자 에드워드 사이드. 그는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동양인들이 자기자신을 규정하는 바로 이런 방식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다. 서양이 끊임없이 동양을 「신비와 미지의 나라」라고 부르자 동양은 화답이라도 하듯 「맞아, 우린 신비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 스스로에게 그 신비함을 강요하던 것이 아시아 문화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아시아 다시보기 열풍의 모습들. 일단 서점에서 쉽게 확인된다. 기행을 통해 아시아를 다시 보게됐다는 내용의 수필들. 「히말라야의 순례자」(임현담) 「떠나는 자만이 인도를 꿈꿀 수 있다」(임헌갑) 「중국에 가니 만리장성은 없더라」(김성길) 등등. 문화비평서. 「바람난 중국인, 변하는 중국땅」(임원춘) 「일본을 안다구요」(한겨레신문사), 「부자나라 가난한 국민」(카렌 반 윌프런) 등. 여기에 고전 「노자의 도덕경」 「채근담」 「명심보감」, 중국 신화집 「산해경」, 일본인 학자 진순신의 「중국의 역사」와 「중국 걸물전」, 「중국사 100장면」 「동양철학 이야기 주머니」, 문예이론서 「현대중국의 리얼리즘이론」,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까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적어도 근대화 과정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던 점성술, 양생학, 풍수지리, 역학 등 역시 이런 분위기를 타고 완전히 복권된 상태. 「쉽게 쓴 역학」 「만화로 보는 주역」 「격암유록」 「풍수지리와 건축」 「천기누설」 등 관련서적 봇물이다.
서점가의 이러한 동양문화 돌풍은 사실 이미 전반에 퍼진 대중문화 속의 현상을 추인하는 것이다. 70년대의 이소룡 영화가 그저 오락의 대상이었다면 80년대 장국영, 유덕화의 「홍콩 느와르」는 더이상 소수 마니아만의 「컬트」가 아니다. 이어 장이모, 첸 카이거 등 중국의 5세대 영화감독, 서극, 관금붕, 왕가위 등 홍콩의 뉴웨이브 영화감독들은 중국어 문화권을 넘어 유럽의 유의미한 영화 텍스트로 자리잡았고, 한국과 일본 등 극동아 문화권에도 깊은 잔영을 남겼다. 이제 그들의 영화는 한계에 다다른 창조력의 대안으로 자기 복제 단계에 들어선 할리우드, 정체의 늪에 빠진 유럽영화의 새로운 대안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시아 아티스트의 음반은 영화의 인기와 동반 상승했다. 86년 「영웅본색」 상영이후 본격적으로 출시된 중국계 음반은 아무리 흥행이 안된다 해도 국내에서 5,000∼8,000장 내외의 판매를 기록한다. 유덕화의 음반은 15만장까지 팔렸다. 여명 장학우 유덕화 곽부성 오천련 소혜륜 양채니 임가의 왕정문 등은 이미 인기 붐을 타고 있다. 이들은 화답이라도 하듯 한국말을 익혀 음반에 우리가요 한 두곡을 수록한다.
일본풍의 멋내기가 쉽사리 동아시아 일대를 풍미하고, 동아시아인들은 인도, 이집트 등 서아시아로 여행길을 재촉한다. 홍콩의 스타TV는 유행을 주도하는 데 이제 더이상 미국의 MTV에 비해 열등한 미디어로 취급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양 문화 취향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서양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제자신을 비춰보던 동양이 이제 그 거울을 스스로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일까?
우선 요즘의 현상이 말그대로 「현상적」이며, 동시에 이미 지난 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문화다원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탈중심, 주변부 문화에 대한 관심은 적어도 그 상당 부분은 유럽의 지식인 중심으로 이뤄져온 작업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생산자였던 서양인들이 스스로 극복자임을 자임하고 나선 지 수십해. 이제 한국땅에서는 반오리엔탈리즘적 문화현상이 동양문화에의 관심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그토록 거창한 「담론적」 상황이라기 보다는 「아시아 키드」들이 이끄는 소비적 유행이며, 그 유행에서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내려는 문화연구자들의 지나친 몽상과 결합된 것이라는 의혹이 생긴다. 홍콩영화 「타락천사」 「중경삼림」식의 4자 제목짓기가 곧바로 수입돼 우리 영화나 노래제목에서도 「지상만가」 「천상유애」식의 조어를 만들었다. 화장품이나 노래 제목도 마찬가지다. 홍콩영화와 가요, 인도와 이집트 열풍은 10, 20대의 소비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오늘의 동양문화가 과연 얼마나 동양의 현실을 숙지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 접어들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 도출된다. 더욱이 전통 동양철학의 복권은 과학으로서의 자리가 아니라 「고고학적」 흥미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철학의 공백기를 틈탄 잠시의 유행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가 깎은 거울로 제 얼굴을 다시 비춰 보려는 노력은 언제나 유의미한 작업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할리우드는 동양인을 똑바로 그려라/무표정한 얼굴·소음같은 목소리/무술달인·신비·돈밝힘 등 영화속 모습은 왜곡 그자체
무표정한 얼굴에 소음 같은 목소리, 무술의 달인이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모습이다. 「문화 다원주의」라는 말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주 오르내리는 미국.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그려지는 한국인, 동양인의 모습은 왜곡 그 자체이다.
작품을 통해 흑인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그리고 있는 뚝심있는 감독 스파이크 리. 하지만 그의 대표작 「똑바로 살아라」에서 한국인은 돈만 밝히고, 흑인깔보기를 취미삼는 인간이다. 막상 주인공이 이태리 피자가게를 불태우고 나자 잔뜩 겁에 질려 『난 백인이 아니야』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아들이 북한에 들어가 납치된 특공대원 아버지를 구한다는 황당한 내용의 「특명 24시」에서는 북한인들이 동남아인 복장을 하고 있는가 하면 「레모」에 등장하는 한국노인은 중국전통 복장이다.
한국 상품은 저질 혹은 부정적 의도로 주로 인용된다.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 등장인물이 친구에게 바이올린 활을 선물하면서 『활도 자동차 만큼이나 천차만별』이라면서 『현다이(현대)부터 캐딜락까지 다양한데 이건 토요타 정도』라고 말한다. 또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스니커스」에서 해커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GOLDSTAR」이다.
한국인을 표현하는 방식이 여전히 「동양」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도 사실. 비교적 차분히 잘 만든 영화 「우리들만의 집」에서 고립무원의 여주인공 케시 베이츠를 돕는 집주인 미스터문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진 한국인상. 그러나 이전의 영화들에서처럼 악당이나 무술의 달인 등 황당한 역할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신비하고 불가해해 「이상한」 느낌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인에 대한 할리우드의 인식은 사실 「감정」수준이다. 영화 「폴링 다운」은 한국인 비하 때문에 말이 많았지만 「블레이드 러너」 「라이징 선」 「데몰리션맨」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반일본」감성 수준에는 미치지는 못한다. 영화 「인도로 가는 길」 「시티 오브 조이」 등 좋은 작품이라고 소문난 영화들 역시 인도를 속세에 찌든 서양인을 정화하는 미지의 나라라는 식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제대로 된 아시아인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일런지 모르겠다.<박은주 기자>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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