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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워즈워스 ‘무지개’/박흥수 한국교육방송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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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워즈워스 ‘무지개’/박흥수 한국교육방송 원장

입력
1997.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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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와 열정이 생필품이었던 젊은 시절/워즈워스 목소리 귀기울이며 자연의 감수성·경외감 배워내가 처음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를 읽었던 것은 스무살 봄이었다. 당시는 모든 한국인에게 무척 힘든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해 땅은 황폐해져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조차 구할 수 없어 고통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존을 위한 필수품 중에서도 당시의 젊은이들이 가장 아쉬워하고 갈구했던 것은 삶의 의미, 희망, 꿈과 같은 것들이었다. 육신의 헐벗음은 젊은 혈기로 버텨나갈 수 있었지만 영혼의 헐벗음은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내 젊은 시절 항상 나를 내리누르는 질문이었다.

이런 내게 문학, 특히 시는 일종의 마지막 도피처와도 같은 것이었다. 문학을 통해서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 나의 감정과 욕구와 생각들이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것을 확인받곤 했다. 한국과 외국의 시를 모두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도 워즈워스, 키이츠, 쉘리 등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에서 가장 공감을 느꼈다. 그들의 시는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갈구와 끝닿은 데 없는 꿈, 열정을 노래한다. 인생의 구체적인 직업에 관한 결정을 내린 것은 몇년 후의 일이었지만 나는 이들의 시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소명에 관해 배울 수 있었고 이 소명을 따라 살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것은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자연을 기꺼이 배우면서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타고난 꾸밈없는 경외심을 잃지않고 살아가리라 다짐하곤 했다.

워즈워스의 「무지개」는 매우 짤막하고 단순한 시이지만 낭만주의자들의 생각을 깊이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한참 쳐다볼 수 있는 삶의 여백을 가지는 것, 그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뛸 수 있는 감수성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해 타고난 마음 속의 경외심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은 바로 워즈워드같은 낭만시인들이, 그리고 내가, 열렬히 바라던 가치있는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한 구절처럼 나는 이제 나이들어 늙었다.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는가? 고백하건데 나는 그렇다고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한편으론 요즘의 하늘에서 무지개를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요, 매연과 산성비로 찌들어 있는 도시의 하늘은 보는 이의 마음을 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쓰리게 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으론 내 마음이 모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일들과 관계에 온통 빼앗겨 있기 때문에 자연현상을 보고 감격할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꼭 무지개가 아닐지라도 도시의 회색 빌딩숲 사이에서도 봄을 맞아 연두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나뭇가지나, 창문을 통해 비치는 한줄기 봄햇살을 감탄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을 지니고 살고 싶다.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바랬듯이. 그러면 나는 인생의 마지막에 내 삶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을 것 같다. 젊은 시절 워즈워스의 이 시를 접하여 이 나이에도 그 감동을 되새길 수 있을 정도로 깊이 깊이 좋아했던 것은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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