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상에 꼭 필요한, 혹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두 속성을 대치시켜 논쟁하는 방법이 있다. 이럴 경우 실속없는 사회에서는 그때 그때 어느 한 쪽에 더 역점을 두어 효율적인 결과를 얻으려는 자세보다는 한 쪽만을 주장하고 다른 쪽의 가치는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 문민정부가 서기 전에 자주 듣던 「민주냐 안정이냐」라는 논법도 그런 종류이고 공연계에서 듣는 「예술성이냐 상업성이냐」라는 이원론도 마찬가지이다(공연은 티켓을 「팔아야 하는」 예술행위이다). 계속하다 보면 피곤해지긴 하지만 목소리 큰 사람들에게는 시간 때우기에 이런 논쟁보다 더 편리한 것도 없다.모차르트가 살았던 18세기 말까지도 「오페라가 노래(음악)냐 말(대사 즉 연극성)이냐」의 논쟁이 있었다. 이런 논쟁을 허망하게 만든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걸작들이지만 실은 오페라가 발생되던 초창기의 대가 몬테베르디의 이상도 「음악과 연극의 완벽한 조화」에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베르디와 바그너라는 두 기둥이 우뚝 선 19세기 중반부터는 「무엇이냐 무엇이냐」따위의 논쟁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에는 『오페라는 역시(!) 노래』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아직도 여럿 있으니 이 나라의 오페라계가 몇 세기에 머물고 있는지 짐작할 일이다.
무대 위는 그렇다 치고 무대 뒤에서 들리는 소리 중에 「지식이냐 현장성이냐」라는 것이 있다. 이 경우 위의 논법에서처럼 지식과 현장성은 서로 대치되는 것처럼 들린다. 「현장」이란 말도 어딘가 설계도면이 없이 마구잡이로 지어대는 「부실공사 현장」같은 인상을 준다. 갖춰야 할 것이 없으면 없는대로, 내일 무너져 내리더라도 일단 얽어세우는 현장경험이 중요하지 지식은 필요없다는 식의 이 논법에 따르면 자동차에 바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도 물리학자 취급을 받을 법하다. 한국오페라계는 어찌보면 오페라는 역시 노래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소위 현장성에 익숙한 사람들이 꾸려나가는 진기한 「판」처럼 느껴진다.
사실 학교라는 데서 배우는 것이 현장에 나섰을 때 필요한 「산 지식」이 아닌 경우가 많고 지식인들이 「빈 말」을 많이 하다보니 지식에 대한 불신이 생길만 하지만 현장에 다름 아닌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데는 지식의 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현장에 대한 지식―「실학」이 다시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에 있다.<조성진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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