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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큰 돈” 3일내내 세뇌교육/한 여대생의 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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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큰 돈” 3일내내 세뇌교육/한 여대생의 경험담

입력
1997.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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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과 친구말 믿고 찾아갔다가 ‘강제’ 합숙/처음에 가졌던 거부감이 점차 사라지고 선뜻 물건 구입/“겨우 빠져 나왔지만 친구 잃어”서울 A대 3학년인 P(21)양은 다단계 판매 얘기만 들으면 지금도 몸서리를 친다. 변칙영업을 하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J사의 다단계 판매망에 빠져 들었던 10여일간이 마치 10년처럼 길었다는 느낌이다. 어느날 과친구 D군이 『하루 4만∼5만원을 벌 수 있는 이벤트업체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줄테니 함께 가자』고 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라 믿고 따라 나섰다. D군이 안내한 곳은 S빌딩 5층 J사 제1전시장. 대학생 등 20대 초반의 젊은이 100여명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60∼70명이 들어갈 듯한 강의실은 모두 처음 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강의가 시작될 무렵 여대생으로 보이는 판매원이 다가와 가방을 보관해 두겠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빠져 나갈 수 없도록 하려던 것이었어요』

강의가 시작됐다. 부담없는 개인적 이야기로 시작된 강의는 차차 회사소개와 다단계 유통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갔다. 첫 강사는 모경제신문 기자였다는 20대 초반의 여성. 『나도 처음 친구를 따라 여기 왔을 때는 괜히 화가 났어요. 그러나 지금은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강사들은 강의내용을 적도록 강요했다. 딴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P양은 D군이 자신을 속인 것이 화가 나 공책에 D군을 욕하는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상오 9시30분부터 1시간30분씩 두차례의 강의가 끝나고 D군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나니 하오 1시30분부터 다시 교육이 시작됐다. 하오 프로그램은 한달에 400만∼1,000만원을 번다는 베테랑 판매원과의 일대일 만남.

다단계 판매의 의미와 재빨리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내용의 반복이었다. 강의 도중 P양은 화장실에 갔는데 문잠그는 고리가 아예 없는 대신 한 여자가 따라와 문앞을 지켜 주었다.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려는 감시자였다.

하오 7시30분 첫날 교육이 끝나 집에 돌아가려고 하자 판매원이 다가와 『2박3일만 시간을 내라』고 종용했다. P양은 마지못해 동의했고 건국대 인근 주택가의 「아지트」에서 잠을 잤다. 강사는 바뀌었지만 3일 내내 똑같은 일정이 반복됐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는 세뇌교육이었다. P양은 『첫날에는 나를 포함 처음 온 여자들의 절반 가량이 울었다』며 『그러나 3일째에는 대부분이 판매원으로 등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때쯤이면 누구나 판매원 등록에 필요한 최소 구매점수를 얻기위해 선뜻 520만원을 던지게 된다. 회원 1명만 확보해도 30%인 155만원을 받게 돼 금방 수백만원을 쥘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때문이다. 『나도 홀린듯이 전혀 필요도 없으면서 선뜻 550만원어치를 구입했어요. 건강보조식품 자석요 화장품 다시마 등이었지요. 대학생들은 등록금을 가져 오기도 했어요. 돈이 없다고 하면 다른 사람 신용카드로 대금을 결제하도록 하고 나중에 현금을 가져와 갚게 하지요』

교육과정에서 의외로 같은 과 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P양을 데려온 D군의 위에는 L양이, 또 그위에는 과친구인 K양이 있었다. 매일 100여명이 새로 들어오는데 80% 가량이 대학생이었다.

P양은 부모님 덕분에 10여일만에 J사의 「먹이 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부모님은 물건을 들고 J사로 찾아 가 현금으로 낸 150여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돈을 되찾아 왔다. P양은 『학교에서 다단계판매원으로 활동하는 과친구들을 만나면 서먹서먹해서 서로 피하게 된다』며 『다단계 판매사업이 친구를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국내외 업체 다단계 열전/올 규모 1조원이상/암웨이 등 외국사가 74% 점유/진로·LG 등 ‘따라잡기’ 시동

「한국 암웨이」 「썬라이더 코리아」 「뉴스킨 코리아」 등 외국계 업체들이 다단계 판매시장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진로 하이리빙」 「LG 생활건강」 「웅진」 등 국내 다단계 업체들이 반격에 나섰다.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에 등록된 다단계 판매업체는 「한국 암웨이」 등 외국계가 13개이고 국내 업체는 120여개. 지난해 시장규모는 7,000억원, 회원은 200만명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기업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진로가 다단계 판매사업에 뛰어 들기 직전인 지난해 6월을 기준으로 그 전 1년동안 10여개의 외국계 업체들이 3,300억원의 매출실적을 올려 약 74%의 시장점유율을 보였다. 이 가운데 「한국 암웨이」는 지난해 2,500억원을 넘는 매출로 다단계 판매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았다. 매출과 직결되는 회원수도 「한국 암웨이」가 약 100만명에 이르렀다.

「썬라이더 코리아」나 지난해 2월 사업을 시작한 「뉴스킨 코리아」도 식물성 건강보조식품과 기초화장품을 판매, 연 400억원이 넘는 실적을 올렸다.

이에 비해 지난해 8월 시장에 뛰어 든 「진로 하이리빙」은 지난해말까지 4개월 동안 4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40만명의 회원을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외국계 업체에 비하면 국내 업체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셈이다. 그러나 국내 업체는 「진로 하이리빙」―「애경산업」, 「LG 생활건강」―「풀무원 생활」 등 유통업체간의 짝짓기를 통해 취급 품목을 늘리고 다단계 판매를 대중화하는 전략으로 총공세를 펴고 있다.

외국계 업체가 고학력 중상류층이나 부유층을 대상으로 화장품 세제류 정수기 건강보조식품 등 특정 상품만 취급하는 반면 국내 업체는 200여종의 다양한 생활용품을 갖추고 구매 계층을 대중화하는 전략이다. 「진로 하이리빙」은 마일리지 방식의 수당시스템을 도입하는 등의 영업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또 외국계 다단계 회사들의 경우 물품배달이 신속히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 전국 14곳에 픽업센터를 설치해 24시간내 물품 도착을 원칙으로 하고 무료로 자택까지 배달하고 있다. 국내업체는 이밖에도 「한국 암웨이」와 같거나 비슷한 품질의 품목을 보다 저렴한 가격에 내놓고 있다.

「진로 하이리빙」 고동호 상무는 『올해 시장규모가 1조원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국내 대기업의 공세로 외국계 업체와의 시장쟁탈전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 암웨이 등의 수입품보다는 국산제품의 대중화가 쉽기 때문에 따라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낙관했다.

◎다단계 교육현장 르포/30대이상 주부들 북적/변칙업체엔 20대 많아

서울 서초구 서초동 강남빌딩 2층 다단계 판매회사인 「진로 하이리빙」. 하오에는 매일 30∼50대 주부들로 북적거린다.

100여명이 들어 가는 강의실에서는 70여명이 다단계 판매 이론 교육을 받고 있었다. 경험많은 판매원이 다단계 판매 유통과정과 사업전개 요령 등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강의실 밖에는 「진로 하이리빙」이 취급하는 각종 생활용품이 진열돼 있고 몇단계씩 회원을 거느린 상위 판매원들이 회원가입 희망자들과 상담하고 있었다. 주로 30대 이상 주부들이 많았고 명예퇴직자인 듯한 40, 50대 남자들도 보였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온 주부 박모씨는 『다단계 판매원으로 한달 20만∼30만원을 벌고 있는 친구 소개로 찾아왔다』며 『처음에는 부정적 인식이 있었지만 취급품목이 10만원 미만의 국산 생활용품인데다 가격도 할인점 수준이어서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칙영업을 하는 다단계 판매업체의 교육장 분위기는 이와는 크게 달랐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S, H, D빌딩은 하오 8시께면 갑자기 왁자지껄해 진다. 변칙영업을 하는 J업체에서 교육을 받고 나온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때문이다. 취재팀이 하오 8시께 S빌딩에 들어갔을 때 사업장이 있는 3, 4층 계단은 두사람이 어깨를 부닥치며 지나갈 정도로 좁았지만 계단참에는 20여명이 벌떼처럼 모여 있었다.

조직을 거느린 상위 판매원이 강의를 하고 있었다. 판매원은 분위기가 산만해지자 『도대체 왜 다른데 신경을 쓰느냐』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교육을 받고 나온 200여명의 참석자 가운데는 금빛 뱃지를 단 사람도 섞여 있었다. 인근 카페 주인은 『금빛 뱃지는 자신이 소개해 물건을 팔았을 때 상위 판매원에게 마진을 넘기지 않고 독차지 할 수 있는 독립조직을 거느린 「DD(독립판매원)」급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들은 건물 밖에 나와서도 둘러 서 20대 여성의 지도로 서로 인사를 하고 「사업 열의」를 다졌다. 『내일 꼭 나오세요. 누구랑 함께 왔지요? 함께 오신 분하고 꼭 같이 가세요』 『우리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화이팅 한번 외칩시다. 뭉쳐야 삽니다. 바로 돌아가지 마시고 회원들끼리 함께 가셔서 저녁도 먹고 얘기들 나누세요』

변칙 다단계 판매업체의 합숙소가 있는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 일대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밤 10시쯤이면 판매원으로 보이는 7, 8명이 떼지어 차례를 기다린다. 다음날 교육장에 데려 오려고 점찍어 놓은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어 관심을 표하거나 설득하는 것이다. 태평2 파출소 정용기 경장은 『이들이 밤만되면 공중전화를 독점하다시피 해 주민들 불만이 대단하다』며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과 이를 막는 사람 사이에 시비가 벌어져 골칫거리』라고 말했다.<이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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