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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상식의 파탄/최상용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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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상식의 파탄/최상용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화요세평)

입력
1997.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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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95% 지지로 출범/정통성 지닌 정권 불구/개혁주체·철학 미비로 측근마저 부패수렁에95%의 국민 지지로 등장했던 김영삼 정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다. 단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개혁을 하고, 허언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상식에 맞는 정치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김영삼정부의 개혁에 대해 4년전에 이미 몇가지 문제점을 제기한 바 있다. 개혁의 개념이 애매하고 개혁의 철학이 없고 그 개혁의 주체세력이 불안정하다고 지적했다.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 어쩌다가 운 나쁘게 걸린 사람에 대한 사정이 개혁은 아니다. 개혁은 국민이 편안하게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개혁은 대통령 한 사람의 독선이나 아집이 아니라 추진 주체가 있어야 하며 그 주체세력은 결코 부패해서는 안된다. 나는 개혁의 주체 세력으로 민주화에 기여했던 세력과 산업화를 추진했던 양식있는 보수세력을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우리 국민은 이 두 세력을 결합할 수 있는 역량을 대통령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정부는 국민을 통합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믿음직한 주체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암울한 시대에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다고 자처한 사람들까지 그들이 비판했던 기득권층과 똑같은 수법으로 부패를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그 뜻이나 알고 한 말인지 의심스럽다. 혁명은 폭력을 독점한 지도부가 도덕적 정당성과 강제 수단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지만, 개혁은 깊은 사려와 성숙없이는 달성하기 어렵다. 개혁은 사람의 사정, 제도의 개혁 그리고 의식의 변화를 다같이 염두에 두면서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깜짝쇼로 그 효과를 극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개혁은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국민이 정부의 개혁 정책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어야 하고 그 개혁을 믿고 예측가능한 가계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영삼정부는 분명 민주적 정통성을 가졌고 개혁 주체로서의 자격과 권한을 갖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개혁정치를 주도할 역량이 부족했으며 그 측근이 중도에 반개혁, 부패의 수렁에 빠짐으로써 그의 개혁은 신화와 현실 어느 면에서도 호소력을 잃고 말았다.

정치는 마치 실타래 같아 한 번 흐트러지면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정치가 꼬일수록, 혼돈과 위기에 직면할수록 상식과 순리와 원칙에 따르는 것이 비용이 덜 든다. 정치의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규범은 공과 사의 구별이다. 이것은 남녀노소가 다 아는 상식이다.

대통령 아들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 정부 출범 초기의 인사나 대통령 부자의 관계 그리고 그 아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짐작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권이 바로 아들 문제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들의 불길한 예측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한보사태에서 상식 파괴의 전형을 보고 있다. 누가 봐도 그 내실이 의심스러웠던 한보에 천문학적인 돈을 대주고, 그 떡고물을 여야 정치인이 나눠가지고, 대통령 부자가 초라하게 대국민 사과를 하고, 거기다 검찰은 범죄사실의 철저한 확인보다 상황에 따라 위아래 눈치나 보고….

도대체 국민이 누구를 믿고 나라를 맡길 수 있겠는가. 그동안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돈 한푼도 안 받았다고 정직성을 강조해 왔는데 이러한 대통령의 「무욕」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측근들은 숨어서 돈을 받아 챙겼으며, 이젠 외로운 대통령을 끝까지 모실 충신도 보이지 않는다. 한심한 작태다. 한마디로 이 정부는 개혁과 상식의 파탄을 자초하고 말았다.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기상천외의 돌파구나 얄팍한 꼼수를 고안하려 하지 말고 그야말로 대도를 선택하여 개혁과 상식의 정치가 뿌리내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데 남은 1년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5년은 후회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다. 역사는 전략적 실수를 되풀이하는 국민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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