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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에 움튼 10여송이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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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에 움튼 10여송이 ‘시집’

입력
1997.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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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을 낸 성미정서 벌써 11번째 유안진까지/저마다의 목소리로 겨울잠 깬 시심을 부른다/성석제­‘검은 암소의 천국’ 쉬운 어조로 주변을 풍자/김명인­‘바닷가의 장례’ 강인한 서정을 노래/박형준­‘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 작은 자연들 사이를 산책시집들이 마치 그간에는 겨울잠이라도 즐기고 있었다는듯, 봄과 함께 쏟아져 나오고 있다. 등단 4년째에 첫 시집을 낸 성미정(30)씨에서부터 11번째 시집을 묶어낸 유안진(56) 교수까지 지난 한주 동안에만 10여권의 시집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독자들을 부르고 있다. 많을 때는 1년에 800종 가까운 시집들이 출간되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시의 나라」로 비아냥되기도 하는 우리나라지만 탄탄한 언어로 무장한 시들을 만나는 것은 늘 반갑다.

민음사는 근 1년만에 「민음의 시」 2권을 펴 냈다. 최근 소설 창작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성석제(37)씨의 「검은 암소의 천국」과 송재학(42)씨의 「그가 내 얼굴을 만졌네」. 창작과비평사는 그간 오랫동안 시의 바깥에 있는듯 했던 양성우(44)씨의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와 신예 박형준(31)씨의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을 냈고, 문학과지성사도 중견 김명인(51)씨와 김윤배(53)씨의 「바닷가의 장례」와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있다」를 나란히 간행했다. 세계사도 유안진씨의 「누이」 등 4권을 한꺼번에 출간했다.

성씨의 시집은 첫 시집 「낯선 길에 묻다」를 낸 뒤 주로 93년 이후 쓴 시들을 묶은 것. 그에게 특징적인 이야기시들-쉬운 어조로 우리 주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그에게 지도자는 「어둠 속에서 개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한 사내」(「지도자」 전문)이고, 무정부주의자는 「남이 해코지하기 전에는 양순한 어른/ 시키면 시키는 대로 때리면 맞은 반대 방향으로 말리면 말리는 대로 끄덕끄덕하는 우리 사이에/ 자나깨나 도리도리하는 아이」(「무정부주의자」중에서)이다. 「나여 가엾은 시의 생산자 그림자를 토해 그림자 위에 씌우고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를 논하는 그림자여」(「그림자」 중에서)라고 말하는 그는 마치 이런 시들을 연상시키는 짧은 분량의 소설들로 최근에 주목받고 있다.

강인한 서정의 시인(평론가 황현산)으로 불리는 김명인씨는 그의 시구에 나오는 안정사의 물고기 풍경처럼 치열한 시작을 계속한다. 「갈 수 없는 곳 풍경 깨어지라 몸 부딪쳐 저 물고기/ 벌써 수천 대접째의 놋쇠 소릴 바람결에/ 쏟아 보내고 있다」(「안정사」중에서). 그는 시집 자서에서 『경험할수록 삶은 곤고한 시간들로 이어진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의 시편들에서 선명하고 아름다운 꽃자국들을 본다. 「내 등꽃 필 때 비로소 그대 만나/ 벙그는 꽃봉오리 속에 누워 설핏 풋잠 들었다/ 지는 꽃비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면/ 어깨에서 가슴께로/ 선명하게 무늬진 꽃자국 무심코 본다/ 달디달았던 보랏빛 침잠, 짧았던 사랑/ 업을 얻고 업을 배고 업을 낳아서/ 내 한 겹 날개마저 분분한 낙화 져내리면/ 환하게 아픈 땡볕 여름 알몸으로 건너가느니」(「등꽃」 전문)

「아침 방죽을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거닌다/ 산책만이 살아있는 유일한 형식/ 누군가 모과나무 사이에서 바라본다면 좋으리라」(「수금 방죽」중에서). 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젊은 시인 박형준씨는 유년의 기억과, 지금은 드문 시어들이 되어버린 방죽, 밭이랑, 저녁해 같은 작은 자연들 사이를 산책하듯 시를 쓴다. 「상춧단을 묶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허드렛일로 일과를 보내는 하루하루가/ 빈 손바닥 군데군데/ 손금같이 오므라들고 있다… 처음부터 우리는 낮아지기 위해서/ 푸르른 공간에 찌들어왔던 것은 아닌가/ 떠나오면 뒤돌아보기/ 몇개쯤은 누구나 들어 있을 만한 빛바랜 추억들을/ 과거의 치수를 재는 데다 사용하고 있지나 않은지」(「텃밭에서」중에서)

박씨는 『시를 쓰는 일에서 시대를 보고 혁명을 꿈꾸는 이들도 있고 단순히 그때 나에게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를 상상하며 시를 쓰는 사람도 있다』며 자신은 후자라고 고백한다. 요즘의 우리 시인들은 이렇게 지난 연대와 달라지고 내면으로 더 깊어지는 시선들로 우리말과 서정을 빚고 있다.<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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