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3월10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호불호를 떠나서 지도자에게 성원을 보내고 격려하고 밀어주는 태도를 우리는 표현할 줄 모르는 것같다. 한보사태의 의혹이 풀리고 풀리지 않고를 떠나서, 그런 것과 상관없이도, 대통령이 국민앞에 사과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일단은 그 용기를 받아들여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도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라가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긴박하다. 검찰도 정부도 대통령도 힘을 잃은채 나라가 표류하는데 대해 정치인들은 방관하고 언론도 합세하면 이 나라는 누가 붙잡아 살리는가…. 레임덕 현상을 걱정한다고 하면서 깎아내리기만으로 대통령을 아무 권위도 없는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그를 향해 어떻게 나라살리기 책임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군사정권 시절에는 신문의 행간을 읽으며 신문에 대한 애정을 키웠으나 요즘은 그런 위안도 없다.』
한보사태 이후의 언론의 태도에 대한 이같은 볼멘소리는 언론으로서는 스스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지금 난파선을 타고 있다. 국민 모두 폭풍우를 만난 배의 동승자들이다. 선장이 잘못했다고 선상반란을 일으키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다가는 배 자체가 뒤집혀 가라앉는다. 밉건 곱건 선장을 따라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라를 살려놓고 봐야 한다. 김추기경의 염려는 이런 뜻이다.
사실 언론은 그 어떤 책임감이나 정의감으로도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을 만큼 마구 흔들어 댈 권리는 없다. 그것은 더 큰 위기의 조성일 뿐이다. 언론의 사명은 위기의 극복에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라고들 한다. 이 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라는 지적도 있다. 언론의 바람몰이가 요원의 불길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라고 떠들어 대니 위기감이 고조된다.
언론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고함들이냐는 핀잔도 나온다. 한보도 대통령의 아들도 진작 언론이 독자적으로 파헤쳤더라면 이 지경으로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타력으로 사실이 드러나자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은 언론 자신의 직무유기를 호도하려는 저의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언론은 비겁하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럴 때는 성역의 울타리를 스스로 널따랗게 쳐놓고 안주하고 있다가 권력이 무력해지면 그 권력을 향해 역공한다. 요즘의 사태도 정권말기에 공교롭게 터졌다고는 하지만 언론의 공세는 그 약세를 틈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쳤던 울타리에 대한 보상심리의 발로다.
그리고 우리 언론에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주의와 독자의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감정주의, 그리고 우르르 무차별 타격을 가하는 몰매주의가 판을 치는 것도, 다분히 감정적인 우리 국민성과도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언론이 임무를 못다해 독자에게 미안하니까 독자의 비위를 맞추자는 것일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은 소위 「신문적 거리」(Journalistic Distance)라는 것이 없을 때가 많다. 신문은 참가자의 입장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 서야한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둔채 역사가와 같은 냉정과 평형을 잃지않고 보도하고 논평해야 하는 것이다. 이 거리를 잃을 때 신문은 독자의 격분을 자극하는 흥분제가 되기 쉽다.
그러나 언론의 자세가 이렇다고 해서 요즘의 사태가 예사롭기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언론이 대통령의 권위에까지 도전하는 것은 나라를 흔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사과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진상을 남김없이 규명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의혹이 풀리고 풀리지 않고를 떠나서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만큼이나마 여러 의혹에 대한 재수사가 시작된 것은 언론이 자신의 과오를 덮기위해서라는 눈총을 무릅쓰고 어제의 성역을 깼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본연의 책무와 자세를 잃지 않을 때 나라는 이 격랑에서 빨리 헤쳐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언론으로서는 군사정권 시절의 신문의 행간만큼도 독자에게 애정을 주지 못해서는 위기 극복의 길잡이가 되기 어렵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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