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4년이 만화같다. 봄날의 꿈, 일장춘몽 같기도 하다. 문민의 이름으로 단행된 수많은 개혁들, 군의 사조직 제거,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그리고 역사바로세우기. 그러나 매우 엉뚱하게도 한 젊은 비뇨기과 의사가 녹화한 비디오의 화면은 그렇게 위풍당당했던 문민의 개혁들을 구겨진 휴지처럼 만들어 놓고 말았다. 정말로 만화같다.비디오 화면이 아니더라도 오늘의 현실들이 유감스럽게도 문민의 개혁성과들을 우습게 만들어 놓고 있다. 기업은 망하고 외채는 쌓여만 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정책수단이 없어 경제는 죽어가고 있다. 대외 금융신용도는 땅에 떨어졌다. 온나라는 김현철씨 문제로 의혹의 안개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치는 여전히 불확실의 정점에 놓여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실의에 빠져있다. 개혁의 성과가 결코 이렇게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뇨기과 비디오 화면의 주인공 김현철씨 주변엔 지금 사람이 없다. 덩그러니 혼자 남아 언제 닥칠지 모를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자연인이므로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다해서 조금도 안타까워 하거나 섭섭해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라면 사정은 다르다. 나라의 위기를 앞장서서 타개해야 할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까닭이다. 대통령주변에 사람은 있으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전해진다. 외롭고 힘빠진 대통령을 보는 국민들은 더욱 힘빠진다. 안타깝다.
때맞춰 권력의 이동이 시작되고 있다. 권력이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이다. 특정인을 요직에 앉히며, 은행대출을 가능케 하고, 그래서 종국에는 국정에 개입하는 영향력, 바로 김현철씨가 누렸던 권력이다. 눈에 안보이는 권력의 누수는 더 심하다. 정치권에서 김대통령의 권위는 급격히 퇴색해 가고 있다. 어느새 김대통령은 야당의 정치공세 대상에서조차 멀어져 가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의 정치적 텃밭, 신한국당 민주계 사람들이 대통령에 대해 듣기 거북할 정도의 말을 하기도 한다. 공직자들은 지엄한 대통령의 권위를 모른체 하고있다. 세월만 가라는 식으로 일손을 놓고있다. 장관이 뜬금없이 사표를 던지는 것도 이런 징후의 하나다. 권력이 빠른 속도로 누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어느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가. 다소 섣부른 감이 있지만 여야의 대선주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선지 여당 대선주자들 주변에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대선주자들이라고 해서 나라의 위기를 타개할만한 뾰족한 대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정치인들이란 나라가 어디로 가든가 말든가 생각은 다른데 가 있는 사람들이다. 한보사태나 김현철씨문제 등도 대선함수와 연결지어 생각할 뿐, 권력을 잡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최근 경제인과 사회단체 등에 보낸 서한에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책이며 반성이다. 김대통령은 『어려운 경제를 되살리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기위해 추호의 사심없이 「유시유종」의 마음가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끝까지 이런 마음가짐으로 퇴임을 맞는다면 그는 청와대를 나와 불행해지지 않은 첫번째 대통령의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국민들은 힘빠지고 권위가 없는 대통령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은 위기의 상황이다. 김대통령이 사심없이 국정을 운영해 갈때 국민들은 대통령을 격려해 줄 것이다. 정권의 안위가 아닌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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