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가가치업종 유치 등 체질개선으로 활로 찾아야구로3공단의 중견 전자업체인 D사는 최근 생산시설을 필리핀으로 이전하는 최후의 선택을 했다.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임금 땅값 물류비 등 각종 비용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업체가 구로공단에서 생산직근로자들에게 지불했던 월평균임금은 70만원선. 그러나 공장을 옮긴 필리핀에서는 국내임금의 4분의 1에 불과한 월 200달러만 주면 고급인력을 구할 수 있다.
땅값도 서울외곽에 위치한 구로공단이 평당 400만∼500만원을 호가하는데 반해 평당 100달러(약 8만7,000원)도 안되는 비용으로 마닐라인근 공단요지에 공장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공장을 이전한 필리핀은 교통난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 수도권에 비해 물류비부담도 훨씬 적고 현지판로개척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구로공단에서 생산활동을 계속했을 경우 파산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서 『공장을 이전한 지역에는 효율적인 생산활동을 막는 각종 행정규제도 거의 없어 상황변화에 맞춰 순발력있게 회사를 경영할 수 있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구로공단을 떠나 해외로 공장을 이전한 업체는 95년말 현재 49개사. 지난해말까지는 60개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로공단에 입주중인 업체가 397개사인 점을 감안하면 6개 업체에 1개꼴로 공단을 떠나 해외로 탈출한 셈이다. 이들이 구로공단을 등진것은 D사처럼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구로공단의 종업원수는 지난해말 현재 3만9,177명으로 80년대말의 절반수준으로 급감했고, 700여명의 해외인력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64년 조성이 시작된 이후 「수출입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구로공단.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기름진 땅」이 아니다. 국제경쟁력을 상실한 한국경제의 자화상처럼 회생가능성도 불투명한 불모의 땅으로 전락했다.
구로공단은 한국경제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비용구조로 기업들이 설땅을 잃고있는 것이 그렇고, 수출구조를 고도화하고 고부가가치화하는데 실패해 수출을 아예 포기해야 하는 현실도 꼭 같다. 공단내에서 업종전환을 통해 체질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가로막고 있는 각종 행정규제도 닮은 꼴이다.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유사하다.
서울시립대 수도권개발연구소 고준환(42) 교수는 『구로공단의 문제는 국내 모든 공업단지의 문제이며 이를 방치할 경우 국가경제가 회생불능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면서 『당장 공업용지재개발에 관한 특단의 법률을 마련, 구로공단을 하루빨리 「벤처캐피털」을 위한 첨단산업단지로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구로공단의 경쟁력상실과 공동화현상을 국내산업 전반의 문제로 인식, 90년대초부터 체질개선과 경쟁력회복을 위해 구로공단을 첨단산업단지로 개편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나 실적은 전무하다. 공업배치법 등에 따라 구로공단에는 제조업 이외 업종의 입주가 불가능했고, 땅값이 워낙 비싸 기존 업체를 이전시키고 새로 업체를 끌어들이기가 힘겨웠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유럽 등의 경우는 우리와 매우 대조적이다. 일본 도쿄(동경)시 외곽의 시나가와(품천)공단은 80년대까지만 해도 부가가치가 낮은 전자제품조립 섬유 등의 노동집약적 업종이 주종을 이루고 엔고 등으로 경쟁력을 잃어 용도폐기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일었다. 그러나 80년대말부터 시나가와구와 일본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각종 규제완화와 세제·금융지원을 통해 연구기능을 대거 유치하고 정보통신 등의 첨단업종으로 면모를 일신해 모범적인 21세기형 공단으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정부는 뒤늦게나마 구로공단의 경쟁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올들어 구로공단에 대한 관리기본계획을 바꾸기로 방침을 정하고 정보통신 영상산업 고급패션산업 등 고부가가치업종과 연구 및 물류기능을 대거 유치하는 내용의 공단재개발계획을 본격추진하고 있다. 그 성패는 구로공단처럼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시급한 한국경제의 회생가능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김동영 기자>김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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