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때 방산지원 업고 고속 성장가도/80년 창업주 타계·2차 오일쇼크 위기/재기 성공 잠시 90년대들어 내리막길서울 관철동에 31층짜리 삼일빌딩을 지어 국내에 초고층빌딩시대를 열며 재계 26위(자산기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던 삼미그룹이 좌초했다.
창업주인 고 김두식 전 회장이 54년 대일기업(목재업)을 설립하면서 출발한 삼미그룹은 70년대 초반 창원기계공단에 스테인리스 등의 특수강을 생산하는 창원제강소를 설립하면서 특수강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3공 들어서는 방위산업체로 지정돼 정부의 중화학공업육성책에 따라 고속성장을 했고 69년에 삼일빌딩을 세워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75년에는 그전에 인수한 삼양특수강과 한국특수강공업을 합병, 한국종합특수강(현재의 삼미특수강)을 세워 철강사업에 본격진출한데 이어 77년까지 삼미금속을 설립하고 특수강 창원공장을 세우는 등 외형을 불렸다.
삼미는 80년 창업주 김 전회장이 타계하면서 첫 위기를 맞는다. 장남인 김현철씨가 회장에 취임했으나 철강경기 하락과 2차 오일쇼크가 몰아치고 경영미숙까지 겹쳐 84년에는 도산위기에 처해 삼일빌딩과 프로야구단을 매각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후 특수강경기가 살아나면서 삼미특수강을 공개하고 삼미화인세라믹스와 삼미전자를 설립하는 등 재기에 성공, 87∼89년에는 재계 17위(매출액기준)까지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무리한 기업인수와 사업확장은 삼미그룹을 회생불능의 지경으로 몰았다.
89년 특수강업체인 미국의 알테크사와 캐나다의 아틀라스사를 당시 해외기업인수로는 최대규모인 2억2,000만달러에 인수했으나 특수강경기가 내리막을 걸으면서 인수이후 4년간 적자경영이 계속돼 그룹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삼미는 자구노력으로 방배동사옥과 부산유나백화점, 인천만석동부지 등을 매각, 1,000억원대의 부채를 갚아나가고 베어링생산업체인 삼미정공까지 한화그룹에 매각했으나 기업의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삼미그룹은 김현철씨가 국내경영에서 손을 뗀 95년 12월 사실상 침몰했다는 것이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이다.
김씨가 해외계열사를 살찌워 삼미그룹을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캐나다로 떠난 이후 동생 현배씨가 지난해초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 1년만에 2조원이 넘는 부채와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해 지난달에는 삼미특수강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창원의 봉강·강관공장을 포철에 매각했고 결국은 회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김 전회장은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며 현지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나 여의치 못해 최근에는 닭고기가공식품 체인점인 케니로저스를 열어 운영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때문에 삼미그룹내부에서는 김 전회장이 부도가능성을 예상하고 해외로 줄행랑한 무책임한 경영인이라는 비난의 소리가 높다. 또 김현배 현회장도 회장 취임후 경영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회사경영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김동영 기자>김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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