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의 따님인 안경선씨가 「렌의 애가」 영인본 한 권을 보내 주었다. 「렌의 애가」는 1937년 4월15일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일월서방에서 초판이 나왔고, 닷새만에 매진되어 5월10일 재판이 나왔는데, 그가 보내준 책은 재판의 영인본이다.어머니의 책과 함께 그가 보낸 카드에는 『어떤 분이 간직하고 있던 그 책을 2년전에 처음 본 후 너무나 갖고 싶어 하다가 어렵게 책을 빌려 영인본 50여권을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대학의 선배, 청춘의 선배라는 의미에서 읽어 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렌의 애가」가 발표된지 60년만에, 어머니를 「청춘의 선배」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말에 이끌려서, 나는 「렌의 애가」원본을 읽는 행복을 누렸다.
문고판 크기에 39페이지의 책은 육필로 쓴 노트처럼, 사신처럼 얇았다. 활자와 맞춤법과 표지는 고색창연하여 아득한 세월을 말해 주었으나, 책을 열자 세월에 풍화되지 않은 사랑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앉아 밤을 새웁니다…> 라는 낯익은 첫 구절이 제1신을 열고, 8편의 편지와 5편의 일기가 격렬하게 이어지는 동안 나는 초면의 독자처럼 빠져들어 갔다. 시몬>
나라 잃은 수난의 시대에 함께 고뇌하며 등불을 밝히려던 정신의 반려이고, 지고한 선의 세계로 이끌어 주기를 갈망하는 절대적인 스승이고, 때로는 흔들리는 약한 인간이고, 사랑하는 사람이고, 사랑해서는 안되는 아내있는 남자였던 시몬… 축복이면서 형벌인 그 사랑을 당당하게 껴안고 육체 아닌 영혼의 사랑을 다짐하는 렌의 노래는 힘차고 찬란하다. 그것은 좌절의 노래가 아니고, 전통의 억압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희구했던 개화기의 한 여성이 사랑을 통해 자각을 얻는 승리의 노래다.
<…실체를 떠나서만 당신을 자유로이 생각할 수 있는 일, 이것이 참말 산 호흡을 가진 인간의 이상입니까. 당신의 몸은 멀리 있고, 영혼은 지금 내 앞에 계십니다… 죽음은 가까운 골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몬 죽음이 내게 가까이 못오도록 해 주세요. 십자가의 의미를 알기 전 죽음으로 돌아가기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시몬 어디 계세요. 멀리 말채찍이 웁니다. 혹시 그가 당신이십니까… 당신 아닌 무형한 신앞에 내눈이 열리기 소원입니다. 저 밝은 성소 안에는 항상 신이 소요합니까. 그 앞에 내 육체를 불사르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살육하고, 고요한 영혼만을 남게 할 수 있으리까. 그러면 찾으려던 선과 미의 하늘이 보입니까…>
세차게 파도치던 렌의 노래는 마침내 <시몬 우리가 범죄함이 없이 청춘의 면류관을 벗었으니 재앙의 잔이 우리앞에 오지 않으리다> 라는 말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노래는 영원한 미완성의 애가로 시인의 가슴에 묻힌다. 27살 때 「렌의 애가」를 썼던 모윤숙씨는 그후 40여년에 걸쳐 그 작품을 계속 보완했는데, 1990년 81세로 타계할 때까지 청춘의 면류관은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걸까. 시몬>
「렌의 애가」는 60년동안 살아있는 스테디 셀러로 오늘까지 89판을 거듭하고 있는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덧칠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은 첫 「렌의 애가」라고 생각된다. 그 첫판이 나왔던 4월, 한국여류문학인회는 모윤숙 재조명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고 (11일 하오 2시 서울 프라자호텔), 안경선씨는 「렌의애가」의 회갑을 기념하여 초판본을 다시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최근 고대 도서관에서 「렌의 애가」 초판을 찾았는데, 그 책은 유진오 박사가 소장했다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청춘의 선배를 기리며 그가 남긴 영원한 청춘의 노래를 다시 읽는 이 봄, 우리가 기려야 할 더 많은 선배들을 생각하게 된다. 청춘의 선배, 어머니… 그 따뜻한 말에 이끌려 우리 어머니들의 청춘도 바라보게 된다.<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편집위원·도쿄(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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