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30억∼40억원 취급,단골 큰손 300명/실명제이후 세금포탈위해 채권거래 급증사채시장의 메카인 서울 명동. 사채업자나 사채 중개인들이 채권회사나 신용회사 등을 통해 막후에서 지하경제를 주무르는 현장이다.
명동에서 제법 규모가 큰 A채권회사의 자금부장 Q씨는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사장인 친형의 권유로 자리를 옮겼다. 비밀유지가 절대적인 업무 특성상 사장과 자금부장은 흔히 가족인 경우가 많다.
업무는 은밀한 사채거래와 채권 매매가 대부분. 여직원 4명을 포함한 A사 직원 8명은 하루 평균 30∼40 「개」 (사채시장에서는 억단위를 흔히 이렇게 부른다)의 현금을 취급하며 많을 때는 하루 200개가 넘는 날도 있다. 급전일 경우에는 회사가 보유한 자금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돈쓸 사람과 전주를 연결해 주고 양쪽에서 수수료를 받는다. 사채금리나 담보 설정 등은 사장과 부장이 직접 전주측과 함께 결정하지만 대리인을 내세우기 때문에 전주가 누구인지 회사측도 알 수가 없다.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않는 게 이곳의 불문율이기도 하지만 큰손일수록 3, 4단계 대리인을 거쳐 돈을 굴리기 때문에 대리인조차 진짜 전주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금융실명제 실시이후 『시중에 몇천억원의 괴자금이 떠돌고 있으며 장기 저리로 쓸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이 돌던 때 Q씨에게도 괴전화가 걸려 왔다. 『컨테이너에 현금이 가득 차 있으니 사채로 돌리거나 채권을 매입해 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는 1,000억∼2,000억원은 족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왠지 꼬리표가 붙은 돈 같아 『융통할 능력이 없다』고 거절했다.
다른 채권회사에 물어 봤더니 역시 비슷한 제의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큰 손이나 기업체의 돈이라면 절대 한꺼번에 큰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20, 30개 정도로 몇번 하다가 신용이 쌓여야 200개, 300개 이상으로 단위를 높여가는 게 상식입니다. 사기꾼이 아니라면 현금관리를 처음 해 보는 아마추어일텐데 규모로 보아 정계 고위층 인사 외에 또 있겠습니까?』
그는 여당의 한 중진의원도 고객의 한사람일 지 모른다고 귀띔했다. 『94년 여름 만기가 다 된 200억원 상당의 채권을 가져 온 사람이 있었어요. 단골 소개로 온 사람이었는데 007가방 3개에 10억∼20억원어치 채권을 가득 담아 열흘동안 계속 찾아 왔습니다. 채권을 거래할 때는 항상 이서를 해야 하는데 이사람은 절대 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타고 온 차번호를 적어 차적조회도 해 보고 소개인의 배경도 조사해 보니 여당 중진의원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것이 분명한 증거는 될 수 없지만 이 바닥의 감으로 봐서는 틀림없습니다』
그가 관리하는 단골은 200∼300명. 전·현직 고위 공직자나 중견기업체 사장, 부동산 임대업자 등이 대부분이다. 큰손들은 거래를 하더라도 명동이나 강남의 채권회사 10여개와 동시에 하므로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일반고객 중에도 많을 때는 한번에 100개 이상 거래하는 사람이 흔합니다. 병원장, 변호사 등은 자주 거래하지는 않지만 한번 할 때마다 규모가 상당한 수준이죠』
일반 고객관리는 주로 채권매매를 통해 이뤄진다. 고객들은 현금으로 채권을 매입해 만기가 도래하기 직전에 다시 회사측에 되판다. 만기 상환때 실명화가 이뤄지는 채권의 특성상 만기 전에 할인하면 실제 주인은 완전히 감춰진다.
Q씨는 세금 포탈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채권거래가 꼽혀 실명제 이후 매매 실적이 부쩍 증가했다고 전했다. 『한번은 서빙고동에 사는 전직 고위공직자가 오라고 해서 갔더니 침대밑에서 맥주 상자에 들어있는 현금 1억원을 내밀고 만기 20년 짜리 채권으로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채권이 증여세나 상속세도 피할 수 있고 또 현금을 물려주는 것보다 여러모로 안전할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모이는 자금은 다른 곳에 사채로 돌리거나 채권매매 자금으로 다시 흘러 들어간다. 금융실명제의 틈을 비집고 이런 돈이 오늘도 지하시장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사채업소 전국 1만여곳,브로커 서울에 5만명/직원 100명 넘는곳도 거래 60%가 기업어음할인
지난해 한국 갤럽과 국민은행,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에서 추정된 사채시장의 규모는 조사방법과 산출방식에 따라 8조4,000억원∼27조원, 9조8,000억원, 11조2,000억원으로 각각 달랐다.
일단 금융권의 차명계좌와 비실명 가명계좌에 있는 지하자금을 뺀 나머지 7조원중 상당부분이 사채시장에 유입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차명계좌 입출금을 통한 사채거래도 적지 않아 정확한 총액 산출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사채시장에서는 사채업소가 전주를 대신해 거래를 맡고 있고 자금수요자를 물색해 연결해 주는 브로커들도 활동하고 있다. 서울의 명동, 신사동, 테헤란로 일대와 역세권 등지에 「OO기획」 「OO투자」 「OO상사」 등의 간판을 내건 소형 사무실은 대개 사채업소로 전국에 1만여개가 영업중이며 브로커는 서울에서만 5만명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사채업소는 1∼3명의 여직원을 고용한 영세업소가 대부분이지만 부동산담보 대출로 유명한 서울 강남의 한 업소는 담보설정 및 회수를 위한 직원수가 100명이 넘고 사무실 규모도 100평이나 된다.
국세청과 경찰은 이들 업소가 이자소득세를 탈루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탈법 색출과 세금 추징에는 번번히 실패하고 있다. 실제 영업은 사무실 바깥에서 은밀히 이뤄지는데다 장부 등 거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당국이 사채의 「현실적 필요」를 감안, 이들의 영업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측면도 부인하기 어렵다. 정부관계자는 『신용과 담보부족, 여신금지조치 등으로 금융권의 대출을 받을 수 없거나 급전이 필요한 중소기업이 수십만개에 이르는 상황에서 사채업소를 대대적으로 단속하면 산업전반에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다』고 토로했다.
사채유형 가운데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전체 거래액의 60% 가량인 기업어음 할인이다. 중소기업 등이 납품대금으로 받은 대기업 어음을 갖고 오면 월 2%안팎의 선이자를 떼고 나머지 금액을 대출해 주는 식이다. 이 경우 사채업자는 1년 단위로 환산할 때 시중금리의 2배 가까운 24%라는 이자소득을 세금 한푼 내지 않고 챙기게 된다. 하지만 이는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 어음에 국한된 최저 이자율이고 신용도가 낮은 기업의 어음은 월이율이 최고 10%까지 올라 간다. 브로커는 보통 대출금액의 0.1%를 수수료로 받는다.
사채업자들은 동일한 「상품」을 취급하는 경우 일정 장소에 밀집해 영업을 하기도 하는데 명동에는 어음할인업소가 몰려 있고 시청앞은 직장인을 상대로한 가계수표 할인 및 신용대출, 신사동 일대에는 부동산 담보대출 시장이 각각 형성돼 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괴자금 사용제의’ 과연 사기극인가/아직 단정은 일러/노씨 4,000억원도 처음 ‘해프닝’ 결론
금융실명제 실시이후 수차례 있었던 괴자금 사용제의는 과연 사기극일까.
돈을 쓰겠다고 회장 결재까지 받았던 기업은 한결같이 이런 제의를 사기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돈의 실재여부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로커들의 괴자금 사용 제의만으로 사기라고 할 수도 없다.
해당 기업이 괴자금 제의를 사기극으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입금되지 않았으며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브로커들이 잠적해 버렸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들 가운데서도 이 돈의 실재여부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다. 조흥은행 위성복 상무는 『수천억∼수조원이나 되는 돈은 관리자체가 어렵다. 금융기관의 신빙성을 빌려 기업을 움직여 수수료를 받아 챙기려는 수법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러나 괴자금 사용제의를 무조건 사기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구석도 많다. 제의를 받은 중견그룹 이상의 대기업들이 터무니 없는 말만 듣고 회장 결재까지 받아가며 자금사용을 고려했을 리가 없다. 최소한 수백억원이 예치된 통장 잔고라도 확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브로커들이 자금 예치를 조건으로 수수료만 떼먹은 일도 없다. 한결같이 수수료는 돈을 예치하거나 실제로 어음할인 등을 통해 전달될 때 받겠다는 제안이었다. 괴자금 사용제의 과정에 은행의 현직 관계자들이 개입한 것도 괴자금 제의가 사기가 아닐 가능성을 크게 한다. 은행직원들이 브로커들의 말만을 듣고 자금중개에 나섰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괴자금설 내사 담당검사는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브로커를 데려다 조사하면 또 그위의 브로커가 나타났다』며 『중간의 일부 브로커들이 잠적해 수사가 일단 중단됐지만 아직 종결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단순한 사기사건일 가능성도 있지만 거액의 자금이 실재할 수도 있습니다. 은행에 돈이 입금되지 않아 기업이 돈을 갖다 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브로커들이 수수료를 챙겨 도망간 것도 아니에요. 사기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지요.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런 돈이 있다고 해도 검찰이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노태우씨 비자금사건이 터지기 2개월 전에 나온 「4,000억원 비자금설」을 수사한 검찰은 단순히 소문이 꼬리를 물어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결론지었다. 당시 검찰은 양파껍질을 벗기듯 브로커들을 거슬러 올라갔으나 결국 돈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실체가 드러난 노씨의 비자금은 검찰의 수사방향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숨쉬고 있었다.<이진동 기자>이진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