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업문 두드리는 얼굴없는 돈/조건은 비밀보장+1% 수수료 뿐/기업들 한사코 “쓴적 없다” 부인불구/일부그룹은 “회장이 결재했다” 소문도/모그룹 차입설 등 온갖 설이 무성한데…/‘금융소득 종합과세’ 피하기 본격시도인가괴자금이 떠돌고 있다. 93년 8월 금융실명제 실시 후부터 중견기업은 물론 대기업에도 1,000억원, 때로는 1조원에 이르는 거액을 저리로 제공하겠다는 제의가 잇따르고 있다. 이같은 괴자금 사용 제의는 95년 10월 전두환· 노태우씨 비자금사건 수사가 시작되자 한동안 수그러 들었다가 지난해 가을부터 다시 고개를 들어 검찰이 올초까지 내사를 벌이기도 했다.
검찰 등 관계당국에 따르면 괴자금은 은행금리의 절반 수준인 연리 6∼7%의 좋은 조건으로 기업을 은밀히 유혹한다. 대신 비밀보장과 총액의 1%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요구한다. 「얼굴없는」 전주가 특정 기업에 대출해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은행에 거액을 예치하기로 약속, 은행이 전주가 지정한 기업에 돈을 쓰라고 제의하는 방식도 흔히 등장한다.
중견기업인 S그룹은 지난해 9월16일 괴자금 사용제의를 받고 1조원의 돈을 어음 할인 방식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S그룹은 법인 인감증명서를 첨부한 「지불합의 각서」도 작성, 그룹 회장과 계열사 대표이사인 S씨가 서명했다. 또 K그룹도 비슷한 시기에 1조원의 괴자금을 연리 6%, 5년거치 5년상환 조건으로 빌리기로 하고 회장이 직접 관련서류에 서명했다. J그룹과 중소기업인 S사는 올초 비슷한 제의를 받았다. 94년부터 이런 제의를 받아 온 J그룹 재무담당 임원은 『검찰의 내사가 진행되던 때에도 제의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K그룹의 한 임원은 취재팀이 입수한 관련서류 사본을 보이자 『전주를 알 수 없는 괴자금 사용제의가 들어 온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구체적인 사용절차는 일절 밟은 바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께 모대기업 부장출신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거액을 쓰라고 제의했어요. 재정경제원에서 관리하는 자금이라며 귀찮을 정도로 자주 연락을 해 왔지요. 또 모은행의 현직과장이 찾아와 돈을 쓰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터무니 없는 소리인 것 같았고 소문이 나면 회사가 타격을 받을 것 같아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지요. 문제의 「자금 요청서」는 조작된 것이고 회장 도장과 서명도 모두 가짜입니다. 1조원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서류치고는 너무 조잡하지 않나요?』
비슷한 제의를 받았던 S, J그룹 관계자도 『거액의 커미션을 받아 챙기려는 브로커 소행으로 보아 조심했고 회장은 알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과는 달리 두 그룹의 회장도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런 조건의 돈이 있다면 얼마든지 쓰려고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괴자금설 내사를 맡았던 당시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이들 그룹 회장들이 직접 자금차입 계획을 결재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대출수수료의 지불이나 괴자금을 실제 사용한 사실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보그룹도 94년 1월 거액의 자금 사용을 제의받고 이사회를 열어 자금차입을 결의했다. 한보그룹 김종국 재정본부장은 자금수령시 「선공제 지불각서」 소지인에게 대출금의 12%를 떼어 준다는 각서에 서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당시의 한보그룹 이사회 회의록에는 차입기관과 금액, 기간 등이 기재돼 있지 않았다. 비밀유지를 속성으로 하는 괴자금이었을 것이란 추정을 낳고 있으나 한보그룹이 이 돈을 당겨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밖에도 괴자금설은 많다. 지난해말 서울 강남의 요지에 개원한 한 병원의 경우 병원을 새로 짓고 고가 의료장비를 갖추었는데 병원 신축자금에 괴자금이 흘러 들어갔다는 얘기가 꾸준히 돌고 있다. 이 병원은 의료장비 대금 결제를 계속 미뤄 80여 납품업체가 채권단을 구성,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 채권단 관계자는 『병원을 지은 K씨는 원래 의료기기 사업을 했는데 이런 병원을 지을 만한 돈은 없었다』며 『정치권의 비자금이 흘러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한 시중은행 지점장이 300억원대의 괴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설도 무성하다. 이 지점장이 자리를 옮기면 돈도 따라 움직여 전에 있던 지점의 수신고가 갑자기 줄어 드는 바람에 이를 메우기 위해 지점에 비상이 걸린다는 것. 당사자는 취재팀과의 전화통화마저 피했으나 주변의 관계자들로부터 『기관의 돈 아니면 유력한 대선후보의 정치자금을 직접 관리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괴자금의 실체가 확인된 적은 없다. 그러나 괴자금이 실재할 것으로 믿는 사람은 많다. 증권가 정보에 밝은 동서증권 L팀장은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으로 중견그룹 회장이나 자금담당 임원에게 제의할 정도면 실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무당국 관계자도 『금융실명제 실시후 사채업자들의 돈이나 정치권 또는 기업의 비자금 등 거액의 불법자금이 떠돌아 다닐 가능성은 크다』고 지적했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거액 사채전주 몇명이 모은 돈이나 금융권에 합의차명 형태로 분산돼 있는 비자금이 올 5월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앞두고 기업자금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이진동 기자>이진동>
◎누가… 어떤 돈을…/안개속 지하자금의 실체/부동산투기로 ‘벼락부자’/사채놀이로 재산 불린 사람/대기업 오너 등이 ‘큰손’ 심증/수십억원대 ‘중치’는 의사·변호사·전직공무원 등…/최근엔 1억원이하의 ‘잔치’들 비중이 커져
지하자금의 전주는 어떤 사람들일까. 세무당국은 전주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돈거래가 워낙 은밀하고 교묘하기 때문이다. 전주들은 거래시 세금 추징을 피하기 위해 절대로 표면에 나서지 않는다. 거액의 전주일수록 수익성보다는 안전성을 중시한다. 서울명동의 한 사채업자는 『전주는 돈의 운용을 맡길 사채업자를 선택할 때 어떤 상황에서라도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서 『아무리 수완이 좋은 사채업자라도 비밀유지에 문제가 있다는 평을 들으면 도태돼 버린다』고 말했다.
결국 전주들의 실체는 사채시장과 기업주변에 떠도는 얘기를 통해 어렴풋이 윤곽을 잡을 수 있을 뿐이다. 당국과 사채시장 관계자들은 수백억∼수천억원을 굴리는 「큰손」은 부동산 투기로 벼락부자가 됐거나 전문적인 사채놀이로 재산을 불린 사람, 또는 대기업의 오너일 공산이 크다고 보고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후 몇몇 기업에 파격적인 조건의 대출을 제의한 거액 「괴자금」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 주인도 바로 이들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실명제의 여파로 뭉칫돈의 은닉과 통상적인 사채업이 불편해 지자 큰손들이 이를 단번에 은밀히 투자할 곳을 물색하게 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 여러명의 전주들이 일종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여기저기 돈 쓸 사람을 찾아 다니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한국조세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거액의 지하자금은 대부분 대기업의 개인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72년 8월 사채동결조치 이후 신고된 사채의 채권자 가운데는 모재벌기업의 총수가 포함돼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재벌총수는 대리인을 내세워 자기회사의 어음을 할인해 개인자금을 회사로 반입하고 고리의 이자를 챙기는 수법으로 사채놀이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경제 분석가들이 경제활력 회복을 명분으로 지하자금 양성화를 한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는 재계의 「의도」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이런 예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으로 괴자금의 실체는 전두환·노태우씨의 「밝혀지지 않은」 비자금이거나 최근 한보에 대출됐다가 「증발된」 돈일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대두하고 있다.
수십억원대의 전주는 사채시장에서 「중치」로 불린다. 이들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뇌물수수, 이권개입으로 부를 축적한 전직 고위공직자 및 정치인이 주류를 이룬다는 전언이다. 수도권에서 성형외과를 개업중인 P(41)씨는 지난 7년간의 수익금 12억원 가량을 사채업자를 통해 굴리고 있다. 그는 『최근 금융소득 종합과세 때문에 집에 쌓아 놓았던 현금을 사채시장에 내놓는 의대 동창생들이 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실명제 실시후 사채시장의 가장 큰 변화는 1억원 이하의 소액전주인 이른바 「잔치」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 사채업자들은 이들의 수가 서울에서만 1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당하지 않으려는 중산층의 가계자금이 대거 지하자금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 사채업자는 『이들의 돈이 사채시장 유통자금의 절반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라며 『소액신용대출이나 카드 및 가계수표 대출자금은 대개 소액전주의 돈』이라고 말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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